모란이 피기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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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이 피기까지는...
  • 관리자
  • 승인 2009.07.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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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 211-1번지에는 현대식 빌라와 아파트 사이에 영랑생가(永郞生家)가 있다. 영랑생가는 시인 김영란(본명 김윤식, 1903~1950)이 45년간 태어나고, 자라고, 시와 음악과 자연, 그리고 고향을 생각하는 순수한 문학적 운율을 적었던 곳이다. 초가집으로 지어진 본채와 사랑채 2동이 있고, 뒷동산에는 대나무와 동백나무로 병풍처럼 둘러진 정미(整美)한 곳이다.





▲ 영랑생가 전경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 作


중학교, 고등학교 때 문학을 배운 이들이면, 한 번쯤 들어보거나, 외웠던 시일 것이다. 순수했던 그때 그 시절,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들판의 잡초들, 그리고 그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애환(哀歡)이 고스란히 시행에 절절히 녹아 있다.


영랑생가를 둘러보면 김영랑 시인의 대표작품인 '모란이 피기까지',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강물' 등의 시가 시비로 만들어져 관광객들은 한가로운 영랑생가의 풍경과 아름다운 영랑의 시를 감상할 수 있다.





▲ 영랑생가 본채에서 바라본 사랑채


생가 안쪽으로 들어서면 동백나무 몇 그루가 둘러선 안채가 있고 마루 가장자리에 나지막한 난간을 두른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 앞엔 작지만 화사한 화단과 연못이 있다. 5월~6월 사이가 되면 시비 주변과 마당 구석에 자리한 모란꽃을 볼 수 있다. 영랑생가는 70년대 새마을운동 사업으로 지붕을 시멘트기와로 보수하고 벽체도 시멘트로 발라 그 원형을 잃어버렸다. 1985년 강진군(康津郡)에서 영랑생가를 매입하여, 가족들의 고증으로 초가집 원형을 복원하고, 현재까지 유지 관리를 맡고 있다. 1986년 전라남도기념물 제 89호로 지정되었고, 2007년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 252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 영랑생가(永郞生家)


김영랑은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을 감추어서 고향으로 내려와 동년(同年) 4월 4일 강진장날 만세운동을 기도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 간 감옥에 복역했다. 이후, 1930년 3월 박용철(朴龍喆)·정지용(鄭芝溶)·정인보(鄭寅普)·이하윤(異河潤) 등과 함께 문예동인지를 창간을 했다. 사회 참여적인 카프 문학이 대세를 이루던 시대에 김영랑은 순수문학을 옹호하며, 현대 시를 언어예술로, 섬세한 정서로 승화시켰다.


해방 이후 김영랑은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평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어 국악이나 서양 명곡을 즐겨 들었고, 축구·테니스 등 운동에도 능하여 비교적 여유 있는 삶을 영위하다가, 9·28수복 당시 유탄에 맞아 사망했다. 그의 묘지는 서울 망우리에 있고, 시비는 광주광역시 광주공원에 박용철의 시비와 함께 있으며, 고향 강진에도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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