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여명의 한서린 잠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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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여명의 한서린 잠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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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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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나루와 잠두봉유적은 한국 천주교의 성지인 잠두봉과 주변에 있었던 양화나루터를 가리킨다. 잠두봉은
봉우리가 누에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적 제399호인 잠두봉 유적지

 





 





1966년 천주교에서 잠두봉을 중심으로 성당과 절두산순교기념관을 세우고 주변지역을 공원으로 꾸몄다.
절두산이라는 이름은 조선 고종 3년(1866)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1만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붙잡아 이곳에서 처형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성당과 기념관 안에는 이벽(李檗)ㆍ이가환(李家煥)ㆍ정약용(丁若鏞) 등 천주교와 관련된 조선 후기 학자들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광장 안에는 김대건(金大建)ㆍ남종삼(南鍾三)의 동상과 사적비가 있다.



잠두봉 주변에 있었던 양화나루터는 잠두봉이 사적으로 지정된 뒤 추가로 지정되었다. 지금은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당시 강변 일대에는
조선시대에 도성에서 김포ㆍ강화로 가는 나루터인 양화진(楊花津)이 있었다. 양화진은 한강나루ㆍ 삼전도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나루의 하나로
진선(津船) 외에 참선(站船) 15척이 있었으며, 후에 조정에서는 관선(官船) 9척을 배치하고 도승(渡丞)을 두어 나루를 관리하게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도승 대신 별장(別將)을 두고 진병(鎭兵) 100여명을 배치하였으며, 어영청(御營廳)의 감독 하에 두었다.





 







 




▶ 아래에서 올려다본 잠두봉

 





 






양화진 일대는 버드나무가 무성하고 경치가 뛰어나서 ‘양화답설(楊花踏雪)’이라고 일컫던 곳으로 조선시대에 중국사신이 오면 이곳에서
뱃놀이를 즐겼고, 사대부들의 별장이나 정자도 강변에 많이 세워져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청나라와 일본을
비롯한 세계 열강들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양화진 일대는 외국인의 거주와 통상을 할 수 있는 개시장(開市場)이 되었다.



조선시대 후기 역사의 흐름과 함께 시대의 많은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가치있는 유적이다.





 






 





▶ 절두산 기념관 내에 있는 김대건 신부와 남종삼 신부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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