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취재] 춤으로 태어나 춤으로 돌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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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취재] 춤으로 태어나 춤으로 돌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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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7.09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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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공연 후 다같이 선 '몌별 해어화' 참가자들>▲(사진=CPN문화유산)


故 장금도, 故 유금선 추모 공연 ‘몌별 해어화’
우리시대 마지막 예기 ‘권명화’ 생의 마지막 무대에 오르다
봄의 끝에서 춤의 노름마치들과 뜻 깊은 공연을 선사하다


6월 20일 오후 4시, 서울남산국악당 크라운해태홀에서 ‘몌별 해어화’ 공연이 개최되었다. ‘해어화’의 뜻은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의미로 당나라 혀종이 양귀비를 두고 한 말이었다가 기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이번 공연은 지난 2013년 9월 12일에 개최된 ‘해어화’ 공연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2013 ‘해어화’는 우리시대 마지막 예기 3인인 군산 장금도, 동래 유금선, 대구 권명화 명인의 무대로 당시에 큰 주목을 받았다.

그 후 6년이 지난 현재, 장금도 명인과 유금선 명인은 소천하였고, 마지막 기예로 남은 권명화 명인을 비롯해 그들을 기리는 춤의 노름마치들이 함께 추모 무대를 꾸몄다. 특히 권명화 명인은 사실상 이번 공연이 생의 마지막 공연이라고 이야기한 만큼 여러 가지로 의미 있는 공연이었다.

<장금도 명인과 유금선 명인>

故 장금도 명인은 1928년, 군산에서 태어났다. 12살에 소화권번에 입적한 이래로 ‘판소리’, ‘승무’, ‘검무’, ‘화무’, ‘포구락’, ‘살풀이춤’ 등을 익혔다. 16살의 나이에 군산 명월관에서 일급 허가증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일본군 위안부를 피해 시집을 갔지만, 해방된 후 다시 판에 나왔다. 활발하게 활동하던 중, 아들이 자신의 직업 때문에 주먹다툼을 하자 그 후로는 한동안 판을 나가지 않았다.

1983년, 1998년 두 차례 명무 공연만 나왔을 뿐 대외적인 활동을 거의 하지 않다가 2002년 다시 무대에 선다. 그 후 2005년 ‘전무후무’ 공연에서는 50년 만에 아들과 화해를 하는 모습이 나타났으며, 아들은 3년 뒤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 아들을 위한 살풀이춤을 춘 이후 요양을 하다가 2013년 ‘해어화’ 공연을 마지막으로 올해 소천했다.

故 유금선 명인은 1931년, 동래에서 태어났다. 14살에 동래권번에 입적했으며, 박기채, 채장술 등의 사람들에게 소리를 배웠다. 17살에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김강남월, 원옥화, 김계월과 함께 ‘날리는 사인방’으로 불릴 만큼 유명해졌다.

그러다 꿈같은 사랑으로 판을 떠났지만 남편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 후 다시 무대에 서고 ‘구음’이라는 최고의 반주음악을 선사한다. 93년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3호 동래학춤 구음 보유자로 지정되었고, 동래학춤 공연에는 늘 함께했다. 2013년 ‘해어화’ 공연을 마지막으로 이듬해 소천했다.

<무대 시작 전 해어화 공연장>▲(사진=CPN문화유산)

<해어화를 위해 모인 노름마치들>

추모공연에는 다양한 노름마치들이 참가했다. 맨 처음은 연희단팔산대 ‘판굿’이 열었다. ‘여성농악단’의 복원을 꿈꾸는 단체로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과 한 명의 남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금도, 유금선 명인도 판을 통해 모셨다. 이번 공연에서 눈에 띄는 모습은 소고를 연주하며 춤을 추는 두 아이였다. 어린 나이임에도 자신의 몫을 다하는 열정에 사람들은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뒤 이어서 정명희 선생의 민살풀이춤이 이어졌다. 정명희 선생은 동편 민살풀이춤을 대표했던 조갑녀 선생의 딸로, 故 장금도 명인의 서편 민살풀이춤과는 다른 동편만의 민살풀이 춤을 선보였다.

다음은 이성훈 선생과 한국의 집 예술단의 동래학춤이었다. 故 유금선 명인이 구음을 하던 춤으로 그를 잇는 김신영 선생이 소리를 내었다. 흰 옷을 갖춰입고 마치 선비와도 같은 고고함을 학춤으로 표현했다.

흰 색상과 고요한 분위기가 이어질 쯤 김경란 선생의 ‘굿거리춤’이 등장했다. 노랗고 파란 한복을 갖춰입은 그는 조소를 전공한 사람으로, 춤의 움직임을 아주 세밀하게 잘 표현했다. 맨손으로 춤을 추다 후반부에 소고를 들었을 때, 존재감은 더욱 커졌다.

흥겨운 분위기는 그대로 이어져 김운태 선생의 ‘채상소고춤’으로 이어졌다. 호남농악의 가락과 영남의 기예를 가미한 색다른 춤으로 앞의 김경란 선생의 소고춤과는 또 다른 볼거리를 선사했다. 사물놀이의 음악에 맞춰서 승모를 돌리며 춤추자 관객들은 환호했다.

뜨거운 현장 속에 국수호 선생의 ‘삼현 승무’가 펼쳐졌다. 우리가 흔히 봤던 승무와는 다르게 짧은 장삼과 가는 북채로 주목을 받았다. 후반부에 몰아치는 북소리와 뿌려지는 장삼은 승무의 현장감을 더 살려주었다.

<공연 대기실에서 만난 권명화 명인(대구시 무형문화재 제9호 살풀이춤 보유자)>▲(사진=CPN문화유산)

<마지막 예기 권명화 명인>

몌별 공연의 마지막 순서로 등장한 권명화 명인은 꽃 같은 분홍빛 한복을 곱게 차려 입었다. 앞선 공연자들에 비해 작은 체구를 가졌지만 춤을 선보이자 모두가 집중했다. 사람들이 뜨거운 환호성을 보내자 명인의 춤도 함께 타올랐고, 객석에서 관객과 함께 소통하는 무대를 선보였다.

권명화 명인은 장금도, 유금선 명인이 소천한 후 한국의 마지막 예기가 되었다. ‘이름난 꽃’이라는 이름의 뜻답게 대구시 무형문화재 제9호 살풀이춤 보유자로 다양하게 활동했다. 지난 2013년 해어화 공연에서 선보인 ‘승무’와 ‘소고춤’은 사람들에게 흥을 일으켰다. 이번 몌별 공연에서는 고령의 나이로 ‘소고춤’만을 선보였다.

특히 이번 공연은 권명화 명인의 사실상 마지막 무대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주목받았다. 권명화 명인은 ‘죽는 그날까지 무대에서 춤을 춰야제’라는 말을 남길 만큼 춤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 80이 넘는 나이에도 여러 무대에 서고 있으며, 수많은 관객들을 춤에 매료시켰다. 좁은 대기실에서의 그는 작은 체구와 고운 얼굴, 분홍빛 한복을 차려입고 있었으며, 뒤이은 7시 30분 공연 준비에 더욱 매진하는 등 여전한 춤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공연을 관람한 후 나오며 하늘을 바라봤다. 유유자적하게 떠 있는 구름들을 보고, 살랑거리며 부는 바람을 느꼈다. 우리의 춤은 유유히 사라졌다가, 새롭게 태어나는 이 순간의 하늘은 아닐까.

취재팀 임영은 기자
lzs0710@icp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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