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再발견 제172편 '보협인석탑 (寶篋印石塔)', 문화재 재발견의 스케치
국보 제209호 ‘보협인석탑’은 원래 천안시 북면 대평리 탑골계곡의 절터에 무너져 있던 것을 옮겨와 세운 것입니다. 절터에는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와 주춧돌의 일부, 기와조각들이 남아 있어 고려시대의 절터로 추정되나, 이 곳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보협인탑이란 『보협인다라니경』을 그 안에 안치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종래에 볼 수 없던 특이한 모습인데, 중국 오월(吳越)이라는 나라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오월국의 마지막 왕인 충의왕 전홍숙(錢弘淑)은 인도의 아소카왕이 부처의 진신사리를 8만 4천기의 탑에 나누어 봉안했다는 고사를 본떠 금, 동, 철 등의 재료로 소탑 8만 4천기를 만들고 그 속에 일일이 『보협인다라니경』을 안치했습니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탑을 보협인탑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이 석조 보협인탑이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복원된 탑의 현재 모습은 5개의 돌만 남아 있어 완전한 형태는 아닙니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형식과는 전혀 달라서 기단(基壇)과 탑신(塔身)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고 완전한 형태를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뚜껑을 덮은 듯한 네모난 상자 모양의 돌 2개를 포개어 놓은 후, 그 위로 귀를 세운 머리장식을 얹어놓은 모습입니다. 불상이 새겨진 육면체 위에 4각형의 받침돌을 놓고, 다시 그 위에 육면체가 놓이는데 4면에 부처님의 전생설화가 새겨 있습니다. 이 탑몸돌 윗면 중앙에는 『보협인다라니경』을 안치했던 것으로 보이는 둥근 사리구멍이 남아 있으며, 당나귀 귀처럼 솟은 맨 윗돌에는 그 안에 석가의 일대기가 상하로 나뉘어 새겨져 있습니다.
전면에 조각이 가득한 이 탑은 중국 보협인탑의 영향을 받은 듯하고 외형도 거의 비슷합니다.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보협인석탑으로서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탑은 2018년에 실시된 인문학적 조사와 3D촬영 등 과학적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기단면석(제1석), 기단갑석(제2석), 옥개석 받침석(제4석) 등 일부 부재가 구조적으로 가장 안전한 방향으로 배치되었습니다. 또한 기존에 부재 간 고임재로 사용되었던 동전을 티타늄판으로 교체하여 안정성을 높였으며, 하단에는 받침석을 새로 제작‧설치한 상태입니다.
CPN문화유산은 국보 제209호 ‘보협인석탑’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CPN문화유산은 앞으로도 숨겨진 문화재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문화재를 국민과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생생한 문화재 이야기를 전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