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동초등학교의 역사와 호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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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동초등학교의 역사와 호압사
  • CPN문화재TV
  • 승인 2023.05.16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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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호압사 경내에 있었던 토지에 세운 학교다. 일제 식민지 시절 일본은 한국의 사찰을 교구 중심으로 바꾸려 관리를 한다.

 

그리고 모두 대처승(결혼한 스님들)을 만들어 버림으로 한국의 정신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하고, 대부분의 사찰 토지를 일본 동척(동양척식주식회사)을 통해 수용한다.

 

이때 호압사도 토지 수용을 당했다.

 

 

호압사 전경(사진=호압사)
호압사 전경(사진=호압사)

 

 

지금의 탑동초등학교 그 밑에까지 추측하건데 사찰 토지였다. 일본은 패망하고 이 토지를 사찰에 돌려주지 않고 대한민국 산림국에서 인수 받는다.

 

그리고 주변에 사찰의 흔적으로 탑이 많았는데, 나중에 탑골이 된다. 산속에 굴러다니는 불상 등이 발견되기도 했다. 어릴 때 가끔 집을 지으려고 하다 보면 사금파리 불상 조각 등이 출토된 것은 이 때문이다.

 

어쨌든 한동안 산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 한강의 상습 침수지역으로 수해 지구가 발생한다. 정부는 용산, 왕십리, 노량진 등에서 대거 수해 주민을 수용시킨다.

 

그 대표적인 곳이 시흥동과 난곡, 그리고 성남이었다.

 

시흥동은 그중 잘사는 사람들을 수용했고, 성남시는 장애인, 맹인, 거리의 걸인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상대원동, 하대원동에 이들의 일자리를 위해 공단을 조성하고 시흥동은 구로공단을 형성시킨다.

 

사람들은 산에 집을 짓고 움막을 치고 살기 시작한다.

 

건축자재는 인근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판데기 장작 같은 것으로 집을 짓고 루핑(콜타르)으로 덧대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시흥초등학교에 다닌다.

 

집이 점점 늘어나고 학생 수가 늘어나자 정부에서는 탑골의 동쪽에 학교를 짓는다. 그것이 탑동초등학교다.

 

 

서울 탑동초등학교(사진=탑동초등학교)
서울 탑동초등학교(사진=탑동초등학교)

 

 

그리고 시흥초등학교 다니던 학생, 선생들이 모여서 집단을 이룬다. 그들이 탑동 동문들이다. 그러니 우리는 사찰 터에 살았던 셈이다.

 

그리고 그것을 수용한 곳에 산림국이었기에 이들이 사는 마을을 산동네라 호칭한 것이다.

 

산동네가 되는데는 이런 배경이 자리잡고 있었다.

 

산림 지역을 관리하기 위해 91번지, 89번지 등으로 세분화 했던 것이다.

 

현재를 보아라.

 

우리는 원래 성남 분당보다 잘사는 사람들이 이주한 덕택에 초기에는 그들보다 형편이 나았었다. 그런데 정치가들이 우리를 개돼지 취급하면서 아무렇게나 정치를 했다. 그러니 지금은 분당보다도 성남보다도 열악하게 변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정치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제대로 된 정치인 한 사람만 있었어도 우리 시흥은 역사성과 호압사 터를 보존하면서 문화도시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그걸 잘하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 우리의 문화를 지키고 잘 살려면 정치가 그래서 가장 중요한 법이다.

 

내 소원은 산림국에서 산림청이 된 놈들에게 강제로 토지 수용한 호압사 땅을 찾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부분 지역 정가의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특히 지역 국회의원이 발로 뛰어야 한다. 대체부지라도 내놓으라고, 지금 건물이 우후죽순 들어선 지역의 땅 비슷한 크기로 산림청 소유의 땅을 되찾으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내가 찾아드린 땅만 해도 숱한 지역이다. 지역 국회의원 최기상이 잘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본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강제로 수용한 땅 그 크기만큼 산림청은 땅을 내놓아야 한다. 그래서 역사를 규명하는 일은 돈을 버는 일인 것이다.

 

탑동초등학교는 사찰 부지에 세워졌다는 것을 잊지 말자!

 

 

산림청(자료=산림청)
산림청(자료=산림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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