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1년 외적 피해 묻힌, ‘청주 사뇌사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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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1년 외적 피해 묻힌, ‘청주 사뇌사의 흔적’
  • 이경일
  • 승인 2024.05.28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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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10월 청주 무심천변의 도로를 확장하는 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사뇌사의 금속유물이 1291년 외적의 침입을 피해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사뇌사 유물'은 불교 의식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범종을 비롯해 향로, 주전자, 촛대, 접시 등 갖가지 용구 400여 점이 확인됐다. 대부분은 고려시대 절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에는 '사뇌사'(思惱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금고(金鼓·절에서 여러 사람을 모을 때 치는 북 모양의 종)도 포함돼 있어 과거 사뇌사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뇌사가 새겨진 금고(사진=국립청주박물관)
사뇌사가 새겨진 금고(사진=국립청주박물관)

 

고려사 연구자인 윤용혁 국립공주대 명예교수는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 펴내는 학술지 '헤리티지:역사와 과학'에 낸 논문에서 청주 사뇌사 유물의 퇴장(退藏.전쟁 등이 발생했을 때 중요한 유물을 묻어두는 것) 시기를 12914월로 추정했다.

 

학계에서는 사뇌사 유물이 언제 묻혔는지를 놓고 여러 견해가 있었다. '기유'(己酉), '경신'(庚申), '무오'(戊午) 등의 기년이 적힌 유물을 토대로 몽골군이 침입했던 13세기, 구체적으로는 1250년대로 보는 의견이 많았으나 14세기까지 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었다.

 

윤 교수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역사서 기록과 당대 사용한 연호 등을 토대로 1291년 카단(哈丹·한자로는 '합단'으로 표기)의 침입으로 인해 각종 용구를 급히 묻었을 가능성에 주목했다.

 

그는 "충주산성 전투는 4월 초순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후 연기현 정좌산(세종시 연서면 쌍전리)에 이른 것은 51일로, 그 과정에서 청주를 거쳤던 것이 4"이라고 추정했다. 1292년 백성들이 '청주산성에서 적()을 피하였다'는 기록을 토대로 충주에서 패전한 카단군이 연기 방면으로 이동하면 그 진로상 청주 경유는 필수라고 강조했다.

 

관련 내용이 원나라 측 기록인 '원사'(元史)에도 남아있으므로 사뇌사 유물을 묻은 구체적인 시기가 거론되면서 추후 연구도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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