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N 뉴스 - 익산 쌍릉 대왕릉 주인 밝혀지나?...발굴현장에서 인골 발견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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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N 뉴스 - 익산 쌍릉 대왕릉 주인 밝혀지나?...발굴현장에서 인골 발견돼
  • 황상윤
  • 승인 2018.04.06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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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최완규 마한·백제문화재연구소 소장

 

 

<▲최완규 소장/마한·백제문화재연구소>

 

4월 3일 익사 쌍릉 대왕릉 발굴현장에서 그동안 성과에 대해 인터뷰하고 있다.

 

 

“이번 발굴 조사에서 나온 인골을 분석하면 익산 쌍릉 대왕릉 주인에 대한 성별, 나이도 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전라북도 익산시 석왕동에는 2기의 무덤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는 쌍릉이 있다.
쌍릉중 큰 것을 대왕릉이라 하고 작은 것을 소왕릉이라 부른다.

 

 

쌍릉은 1917년 일본인이 조사할 당시 이미 도굴이 돼 유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조사 100년 맞아 마한·백제문화재연구소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8월부터 쌍릉 중 대왕릉에 대한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익산 쌍릉(사적 제87호)>

 

2017년 8월부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와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함께 쌍릉 중 대왕릉에 대해 발굴조사를 하고 있다.

 

 

이번 조사를 통해 대왕릉이 부여 능산리고분보다 석실이 큰 왕릉급 무덤인 것으로 조사됐으며 중앙에 입구를 마련하고 단면육각형의 석실로 축조된 전형적인 백제 사비기의 굴식돌방무덤으로 확인됐다.

 

 

또 백제 왕릉 최초로 판축(版築) 기법을 사용해 봉분을 조성한 것을 확인했고 이는 인근 제석사나 미륵사의 탑지, 금당을 만들었던 판축기법과 같은 것으로 확인됐다.

 

 

그리고 1917년 조사 당시 인골을 담아 뒀던 나무상자가 발견돼 앞으로 DNA 분석을 통해 대왕릉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익산쌍릉 대왕릉 발굴현장>

 

대왕릉 발굴과 관련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발굴현장에서 최완규 마한·백제문화재연구소 소장에게 들었다.

 

 

-익산 쌍릉은 어떤 곳인가요?
쌍릉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두 개의 릉이 있어서 쌍릉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익산 무덤 중 ‘왕릉’에 해당하는 무덤이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
이 무덤에 대해서는 고려사에 보면 후조선 왕 '무강왕'과 그의 비릉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서동, 즉 '말통대왕'의 릉으로 적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백제의 '무왕'과 그의 비릉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대왕릉 모습
1917년 일본인 학자 '야쓰이 세이치'에 의해서 처음 발굴되었다. (자료제공: 문화재청)>

-쌍릉 발굴은 이번이 처음인가요?
이 무덤은 약 100년 전인 1917년 일본인 학자 '야쓰이 세이치'에 의해서 발굴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13줄 분량의 보고서를 보면 이 무덤 주위에 호석이 둘려 있는 것, 무덤 구조, 그리고 이것이 왕릉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쌍릉은 일제강점기 발굴 당시 이곳에서 나온 목관의 형태, 관재, 그와 결부되어 있던 여러 가지 금부장식들을 보면 이곳이 왕릉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익산 쌍릉 대왕릉
이문현 책임연구원(마한백제문화재연구소)이 석실 내부를 설명하고 있다.>

 

-이번 발굴조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작년 (일제강점기) 발굴 100주년으로 국립전주박물관에서 특별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나온 목관을 복원해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규모, 만들어진 가구 수법 등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경주를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때 발굴한 여러 왕릉을 재발굴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쌍릉, 특히 대왕릉 일대에서도 발굴 필요성이 제기돼서 작년부터 지금까지 발굴조사를 진행해오고 있습니다.

 

 

<▲대왕릉 석실 내부
천장 부분에 도굴로 인한 구멍이 나 있고 옆에는 그을음이 남아있다.>

 

-발굴조사 결과 새롭게 알려진 사실은 무엇인가요?
발굴조사 결과 석실 규모가 부여 능산리의 어떤 석실분보다 규모가 큰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 이야기는 부여 능산리의 왕릉과 같은 왕릉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려사 기록에 보면 이곳을 도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번 발굴조사에서 저희가 내부의 석실을 파괴하고 들어와서 도굴했던 흔적 두 군데를 찾았습니다.
석실 위 주변에 그을음이 있는데 아마도 등잔을 피웠던 흔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석실에 커다란 판석이 있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판석의 형태는 미륵사지 석탑 가공 수법과 똑같습니다.

 

 

<▲대왕릉 내부에서 발견된 목함
일제강점기 때 일본 학자가 담아둔 인골 목함 발견으로 무덤 주인의 성별과 나이를 알 수 있게 됐다. (자료제공 문화재청)>

 

-또 다른 성과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나요?
일제강점기 당시 발굴했던 학자들이 목관과 다른 것을 꺼내고 당시 수습했던 인골들을 조그마한 목함상자를 놓고 나갔는데 이번 조사에서 발견됐습니다.
그것은 보존에 대한 문제가 있어서 바로 문화재연구소로 이송했으며 앞으로 인골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질 겁니다.
그러면 무덤 주인에 대한 성별, 나이 문제도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백제 왕릉 최초로 봉토를 확인했다고 하던데 맞나요?
이번 발굴에서 중요한 것은 백제 최초로 대형 왕릉에 대한 봉토를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봉토는 석실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흙인데, 판축 수법으로 아주 단단하게 쌓아져 있고 지름 25m, 높이가 5m 되는 대형 봉토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봉토를 만드는 기법은 인근 제석사나 미륵사에서 탑지나 금당들을 만들었던 판축 수법과 똑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번에 조사된 봉토에서는 익산이라고 하는 새로운 기술력, 익산을 상징할 수 있는 독특한 문화 양상을 파악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의가 있습니다.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이곳이 왕릉이 있었기 때문에 주변에 관련된 여러 가지 시설이 있을 가능성이 있어 주변조사를 함께 진행할 예정입니다.
또 고분이 어떻게 축조되었는지에 대한 몇 가지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정밀조사들을 앞으로 진행하고, 이 조사가 끝나면 옆의 소왕릉도 발굴할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익산이라는 지역은 백제 무왕의 원대한 꿈이 서려져 있는 곳이기 때문에 백제 말기 다른 유적들에 대한 성격 같은 것이 이번 발굴을 계기로 밝혀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취재팀 황상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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