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운동의 선구자 '홍암(弘巖) 나철(羅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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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운동의 선구자 '홍암(弘巖) 나철(羅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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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9.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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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부는 9월의 문화인물로 구한말·일제초기의 종교가이며 사상가인 '홍암(弘巖) 나철(羅喆, 1863~1916)'선생을 선정했다. 나철은 1909년 전래의 단군신앙을 재건해 '대종교(大倧敎)'라 일컫고 종교운동·국학운동·항일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전남 보성 벌교읍의 양반가에서 태어나 유교적 소양을 가졌던 나철은 개화사상에서 근대화로 눈을 돌이고, 일본을 내왕하며 조선수호를 위한 외교활동을 펼치던 중 1907년 을사오적 처단을 주도해 유배되기도 했다.

나철은 단군신앙을 접하면서 유학자에서 국학자로 변신하게 되는데, 대종교의 부활을 계기로 국어·국문·국사·국교를 회복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노예적 사관에서 자주적 사관으로, 유·불 정신에서 신교(神敎) 정신으로, 한문어를 국문어로 혁신해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는 발판을 마련했다.













▶ 9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된 '홍암(弘巖) 나철(羅喆)'



나철은 망국으로 치닫는 격변기에 평소 품어오던 '국망도존(國亡道存), 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존재한다'의 정신을 단군신앙의 부활에서 찾고자 했다. 이 정신은 훗날 '국혼'을 지키고자 한 박은식과 '국수'를 갈망하던 신채호로 연결되었다.

조선은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에도 불구하고, 유교를 국시로 삼아 공식적인 언어로 한문어를 사용했었다. 한글은 '정음(正音)'에서 언문·반절·국문 등으로 명명되면서 일제 강점기를 지나 우리 민족의 자랑스런 말과 글이 되었다. 이렇게 한글이 지켜진데에도 나철의 역할이 컸다. 그는 단군교단으로부터 받은 '단군교포명서'나 '구약문류(規約文類)', 직접 쓴 노랫말 '중광과(重光歌)'등을 통해 순수한 우리말 구사능력을 구사했다. 이는 주시경·김두봉·이극로 등으로 이어져 한글 운동의 동인이 되었다.



또한 나철은 반존화적(反尊華的: 중국 학문인 유교문화를 우선시하는 존화사상을 반대함) 역사관과 신교적(神敎的) 정신사관을 통해 민족사학의 틀을 마련하고 김교헌·박은식·신채호로 이어져 근대문족주의 사학의 지평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철은 대종교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비롯한 것임을 강조하며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국교의식을 환기시켰다. 그는 최치원의 '국유현묘지도(國有玄妙之道)'에 나타나는 국교의식을 통해 '최치원의 풍류도야말로 국가적·민족적·영토적·문화적 통합에 의해 형성된 한국 고대의 가장 뚜렷하고 독창적인 종교·사상·문화'라고 파악했다.



철학적인 방면에서도 우리 민족 고유의 사유체계를 유·불·선을 합친 '삼일철학(三一哲學)' 혹은 '종사상(倧思想)'이라고 체계화시켰다. 그가 저술한 '신리대전(神理大全)'에 이러한 삼일철학의 원리가 극명히 보여진다.



나철은 1916년 8월15일 국학이 무너진 현실을 통탄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유언에 의해 백두산 기슭인 만주 화룡현 청파호 언덕에 봉장되었다.













▶ 민족운동의
선구자 '나철'(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과 그의 묘






문화관광부는 나철에 의해 주도된 국학 부흥운동이 우리 근현대사의 문·사·철을 중심으로 새로운 혁명을 일으켜 민족 정체성 확인의 근거를 마련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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