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조선의 역사를 바꾼 화완옹주의 무덤을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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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조선의 역사를 바꾼 화완옹주의 무덤을 찾아라!
  • 관리자
  • 승인 2005.09.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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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완옹주는 조선 21대 왕인 영조의 딸이다. 영조는 1724-1776 동안 노소론의 균형을 통해 나라를 다스린다. 휘는 금(昑). 자는 광숙(光叔)이다. 호는 양성헌(養性軒). 숙종(肅宗)과 숙빈(淑嬪) 최씨(崔氏)의 아들로 조선의 역대 왕 중 최장 기간을 재위하였다.



1699년 연잉군(延仍君)에 책봉되었고, 즉위 직후 소론을 몰아낸다. 그러나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계기로 다시 노론을 중용하였다. 이와 같은 정치 지형은 유감스럽게도 1762년 자신의 아들인 장헌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영조는 영빈 이씨를 통해서 장조(장헌세자)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 등을 낳았다. 영조는 대체로 영빈 이씨의 소생들 중, 특히 어릴 적 죽은 화평옹주와 화완옹주를 병적으로 사랑했다. 사도세자와 다른 옹주들은 병적으로 미워했다.



화평옹주는 심성이 너그러웠다고 한다. 비운의 왕자인 사도세자를 항상 보호하려고 했고,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에도 적극 개입 가교 역할을 했다. 이런 화평옹주는 결혼 후에도 부마와 함께 출궁하지 않고 궁에서 살았다.



하지만 화평옹주는 일찍 죽고 만다. 이때부터 영조는 더욱더 광적으로 사도세자를 미워하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사도세자의 부인이었던 혜경궁 홍씨가 누구보다 화평옹주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 이장되기 전
화완옹주의 무덤 사진(왼쪽)과 현재모습(오른쪽)







화평옹주와 달리 화완옹주는 애교가 많아 영조에게 사랑은 받았지만
성정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자신의 올케가 되는 혜경궁 홍씨를 무던히도 괴롭혔을 뿐만 아니라 정조의 왕비가 되는 효의왕후 김씨 역시 화완옹주로부터 끊임없이 시기와 질투를 받는다.



화완옹주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집안과, 당시 총애 받던 후궁인 문숙의, 노론계의 신하와 한패거리가 되어 사도세자를 끊임없이 음해하여 결국 사도세자는 죽음을 맞는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화완옹주는 실세로 급부상하여 영조 말년의 정사는 화완옹주가 좌지우지 하는 형국이 되었다.



그러나 양지가 음지 되는 법, 음지가 양지되는 법은 만고의 진리인 듯, 갖은 고통 속에서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에 의해 화완옹주는 철저히 파괴되는데, 양자 정후겸은 귀양 뒤 사사되었고, 화완옹주는 궐 밖으로 쫓겨났다. 그리곤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조선의 왕의 딸 중에서 정치에 개입한 딸은, 특히 옹주라는 신분으로는 화완옹주가 유일하다.



그런 화완옹주의 무덤은 남편인 정치달과 함께 문산에 있다. 파주시 향토문화재로 지정되어있다.













▶ 남편 정치달의
옆으로 이장된 화완옹주의 무덤






황의정승 유적지가 있는 사목리에서 왼쪽 산로를 접어 들다보면 있었는데 그런데 졸지에 무덤이 없어진 것이다. 몇 차례 산 중을 헤매고 다녔는데 풀밭만 무성할 뿐, 무덤을 발견할 수 없었고, 대신 무덤 주변을 에워쌌던 기와 몇 조각만 풀숲에서 발견했다. 갈지자로 죽죽 뻗어 오른 풀숲은 지형도 고르지 않아 몇 차례 비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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