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쌍릉 소왕릉은 선화공주의 묘인가? 문자 없는 묘표석 2기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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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쌍릉 소왕릉은 선화공주의 묘인가? 문자 없는 묘표석 2기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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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9.19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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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왕릉 발굴 현장 남쪽 전경>▲(사진=문화재청)


국내 최초 왕릉급 고분에서 두 종류의 묘표석 출토
선화공주에 대한 자료는 못 찾아... 규모나 품격은 왕릉급
오는 20일 발굴현장 설명회 개최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익산시와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시행한 사적 제87호 익산 쌍릉 중 소왕릉에서 묘표석이 확인되어 오는 20일 오후 2시에 발굴현장을 공개한다.

발굴현장은 전북 익산시 석왕동 6-11번지 일원이다. 익산 쌍릉은 대왕릉과 소왕릉이 약 180M 떨어져 위치한다.

익산 쌍릉은 문헌 기록에 의하면 백제 무왕 서동과 그의 왕비 선화공주의 능으로 알려져 왔고, 고려 시대에 이미 도굴된 기록도 남아 있다. 이들 두 고분은 1917년 일본인 학자(야쓰이 세이이쓰)에 의해 발굴된 바 있으나, 정확한 정보를 남기지 않아 재작년 8월부터 고분의 구조나 성격을 밝히기 위한 학술조사가 진행되어 왔다.

소왕릉에 대한 발굴조사는 올해 4월 고유제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봉분과 묘도의 축조과정과 양상을 파악하였으며, 일제강점기 당시 발굴 흔적과 그 이전 도굴 흔적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발굴조사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국내 최초로 왕릉급 고분에서 두 종류의 묘표석이 발견된 점이다. 비석형으로 된 것과 기둥형으로 된 것이 나왔는데, 비석형 묘표석은 석실 입구에서 약 1미터 떨어진 지점에 약간 비스듬하게 세워진 채로 확인되었다. 크기는 길이 125㎝, 너비 77㎝, 두께 13㎝이며, 석실을 향하고 있는 전면에는 매우 정교하게 가공되었고, 그 뒷면은 약간 볼록한 형태다.

기둥형 묘표석은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봉토 내에서 뉘어진 상태로 발견되어 원래 위치인지는 불분명하다. 길이 110㎝, 너비 56㎝의 기둥모양으로 상부는 둥글게 가공되었고, 몸체는 둥근 사각형 형태다. 이들 두 묘표석은 문자가 새겨지지 않은(무자비) 형태로 발견되었다.
<석실과 묘표석>▲(사진=문화재청)

이번에 묘표석들이 나온 소왕릉의 봉분은 지름 12m, 높이 2.7m 정도로, 암갈색 점질토와 적갈색 사질점토를 번갈아 쌓아올린 판축기법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대왕릉 판축기법과도 유사하다. 석실은 백제 사비시대의 전형적인 단면 육각형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이다.

석실의 규모(길이 340㎝, 폭 128㎝, 높이 176㎝)는 대왕릉의 석실 규모(길이 400㎝, 폭 175㎝, 높이 225㎝)에 비해 작은 편이지만 측벽 2매, 바닥석 3매, 개석(덮개돌) 2매, 후벽 1매, 고임석 1매의 구조 짜임새는 동일하며, 석재 가공 역시 치밀한 편이다.

고분의 입구에서 시신을 안치한 방까지 이르는 길은 짧은 편으로, 연도 폐쇄석과 현문(시신을 안치한 방문) 폐쇄석이 두 겹으로 구성되어 대왕릉과 같은 양상이다. 소왕릉 석실의 바닥에는 시신을 넣는 관을 얹어놓던 평상 널받침(길이 242㎝, 폭 62㎝, 높이 18㎝)이 놓여있었다.

<일제강점기 도굴괭 내부 기둥형 석재>▲(사진=문화재청)

묘도(방까지 이르는 길)은 석실 입구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규모는 최대 너비 6m, 최대 깊이 3m, 현재까지 확인된 길이는 10m 가량이다. 일정한 성토(성질이 다른 흙을 서로 번갈아 가면서 쌓아올리는 기술)를 통해 묘도부를 조성한 후 되파기한 걸로 판단된다.

폐쇄부는 점질토와 사질점토를 번갈아 쌓았다. 묘도부 10m 지점 끝단에서는 다듬은 석재를 이용해 반원형상의 석재를 놓아 묘역의 범위를 표시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석실 천장의 북동쪽 고임석(천장부를 받치는 석재) 부분에는 일제강점기 이전에 만들어진 길이 68㎝, 높이 45㎝ 정도의 도굴 구덩이가 확인됐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소왕릉은 선화공주와 관련된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고분이지만, 이번 발굴에서는 관련된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대신, 봉토나 석실의 규모와 품격에 있어서 왕릉급 임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또한, “이번에 발견된 묘표석은 각각 석실 입구와 봉토 중에 위치하고 문자가 없는 점에서 무덤을 수호하는 진묘와 관련된 시설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백제 왕실의 장묘제 연구에 새로운 계기가 마련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취재팀 이경일
leegy1997@icp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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