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고찰 보현사에서 낭원대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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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고찰 보현사에서 낭원대사를 만나다
  • 관리자
  • 승인 2006.0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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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7호 보현사대웅전(普賢寺 大雄殿)



보현사는 신라 진덕여왕 4년(650)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처음 세운 사찰이다. 후에 낭원대사(朗圓大師)가 고쳐 세웠고 '지장선원(地藏禪院)'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후기에 세운 것으로 3단의 장대석(네모지고 긴석재로 기단에 가로로 길게 놓은 돌) 기단을 설치하고 막돌 덤벙 초석을 기둥이 미끄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 정교하게 그레질한 후, 둥근 기둥을 세웠다. 정면3칸, 측면 3칸의 다포 양식이며,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건물 안에는 흙으로 만든 삼존불상을 모시고 있고, '도광 2년(1822)'이라고 쓴 기록이 있는 후불 탱화와 '가경 4년 기미(1799)'라는 기록이 있는 탱화가 있다.


경내에는 낭원대사의 사리탑인 낭원대사오진탑(보물 제191호)과 낭원대사오진탑비(보물 제192호)가 있어 이 사찰의 역사적 가치를 말해 주고 있다.






















- 보물 제191호 보현사낭원대사오진탑(普賢寺 朗圓大師 悟眞塔)




보현사낭원대사오진탑(普賢寺朗圓大師悟眞塔)은 보현사에 자리하고 있는 낭원대사의 부도(浮屠)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무너져있던 것을 사찰입구에 복원해 두었다가, 1991년 다시 원래의 자리인 산꼭대기 주변으로 옮겼다. 부도(浮屠)는 승려의 사리(舍利)나 유골을 모신 일종의 무덤이다.










기단에서부터 전체적으로 평면을 8각으로 만든 8각원당형이다. 무너져있던 것을 다시 세웠으나 탑신을 받치는 기단부의 가운데 기둥과 상륜부의 일부 부재는 없어졌다.



커다란 한장의 돌로 된 지대석(地臺石) 위에 기단부가 놓여 있는데, 기단부의 아래 받침돌 밑면에는 안상(眼象)을 1구씩 조각하였고 기단부의 아래 받침돌 위면에는 두마리의 용을 새겨 놓았다. 기단부의 위 받침돌은 2단으로 새겨져 있다.


탑신석에는 앞뒤로 문틀과 자물쇠를 새겨 놓았으나 앞면에는 문고리도 새겨 놓았다. 옥개석은 탑신부에 비하여 폭이 넓고 두꺼운 편이며, 추녀선은 얇으나 약간 반전하였고, 아랫면에 3단의 받침이 있다. 옥개석의 윗면은 물매가 급하며 각 모서리에는 귀꽃이 있었으나 파손되어 흔적만 남았다.


상륜부에는 납작한 타원형 복발이 있고, 그 위에 옥개석을 축소한 것과 같은 보개(寶蓋)가 놓여 있는데, 모서리에는 귀꽃이 일부 남아 있다.
낭원대사오진탑비가 고려 태조 23년(940)에 건립되었으므로, 이 부도도 이 때 같이 세워놓은 것으로 보인다.


















- 보물 제192호 보현사낭원대사오진탑비(普賢寺 朗圓大師 悟眞塔碑)








보현사낭원대사오진탑비(普賢寺 朗圓大師 悟眞塔碑)는 보현사에 남아 있는 낭원대사(834∼930)의 탑비로, 대사의 출생에서부터 경애왕이 대사의 덕을 기려 국사로 예우한 사실 및 입적하기까지의 그의 행적이 실려 있다.


비석의 거북 모양 받침돌은 네모난 지대석(地臺石) 위에 놓여 있다. 거북의 머리는 용의 모습처럼 만들었으며, 등에는 6각(六角)의 거북등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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