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 동다송(東茶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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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 동다송(東茶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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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7.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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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작가 이재호는 충남 홍성에서 출생하였다.


‘세익스피어 바로 알기’ ‘네 죄를 알렷다’ 희곡을 발표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하였고, 연극에 심취하여 청춘의 일부를 소비하였다. ‘96년 대대적으로 기획하였던 지방 공연 실패 후 한동안 술과 여행으로 떠돌아 다녔다.


‘네 죽음보다 깊은 잠’을 지방신문에 연재하면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였고, 97년 이후 유니텔 통신에 글을 연재하면서 통신작가로 변신하였다. 97년 말 천리안 통신문단으로 이적하면서 작가협의회 회장을 맡아 사이버 문학 진흥을 위해 노력을 경주하였다.


‘98년 통신문학 알리기의 일환으로 ’사이버 문학‘을 창간하였고, 통신작가와 기성 작가의 공동작품집 ’나는 더 이상 p샴푸를 쓰지 않는다.‘를 펴냈다. 현재는 문화재방송국 편집국장으로 글쓰기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동다송(東茶頌) - 재해석(再解釋)


동다송을 직역한 글은 홍수처럼 넘쳐난다. 인터넷만 뒤져보아도 같은 내용으로 수도 없는 저작물이 검색될 정도다. 차를 마신다고 하면, 차에 관련하여 글좀 쓴다는 사람은 다 이렇게 저렇게 동다송을 자기화하려고 했다. 홍수처럼 넘쳐나는데, 또 한편을 더하여 대대적인 홍수(?)를 연출하고자 다시금 동다송을 번역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직역이 아닌 아주 옅은 한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감히 의역에 도전해보고자 하는 무모함의 소산이다. 동다송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차의 고전이다. 동쪽나라의 차를 찬양하는 노래이며, 서사이며, 또한 철학서이다. 즉, 동다송은 그 이름으로 세상 빛을 보기까지의 모든 배경을 살펴보는 것은 그나마 너도나도 동다송에 이름 걸고자 하는 홍수를 다소 건조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만들 수 있는 법이다.


해남의 우록 김봉호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면서 차에 대하여 어렴풋이 다가 설 수 있었던, 스스로 다인이기보다는 변방이기를 자처한 필자가 어림없는 실력으로 감히 욕심을 내보았다. 동다송을 찬양하는 너무도 훌륭한 글귀들이 가득한 요즘 세태에 얼치기의 무모한 도전을 살펴보는 아주 엉뚱한 흥미와 그로 인해 차인들의 지평이 넓혀진다면 내가 동다송을 한 줄이라도 의역했다는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동다송(東茶頌)은 당연히 초의선사(艸衣禪師)에 의해 지어졌다. 해거도인(海居道人) 홍현주(洪顯周)의 부탁으로 지어졌는데, 그 연유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자.


(承 - 海居道人 命作, 승 - 해거도인 명작)


상기 문장을 보면 명작(命作)이라 했는데, 분명 스스로 작자의 권리인 작(作)으로 간략화 할 수 있었음에도, 명령(命)이라는 명(命)을 서두에 둔 것은 아주 미세한 표현의 갈등 내지는 무언가 초의선사의 속마음이 다소 오류 속에 있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문장의 차이는 바로 타인에 의한 의지인 명령(命)을 통해 받들어 짓다. 혹은 지을 것을 명령(命)받다, 의 미세한 차이다. 전(前)은 명령(命)이 우선하고 후(後)는 짓는 행위(作)가 우선한다. 전자는 다소 피동적이고 후자는 다소 적극적이다. 그러기에 이 문장의 속뜻을 추정하자면 초의선사의 뜻으로 자발적으로 지어진 것이 아닌 해거도인 홍현주의 강력한 뜻이 우선해서 지어진 것이며, 그것이 동다송의 전반적 주류 사상에는 초의선사의 사상이 담겨 있지만, 글을 부탁한 사람의 격에 맞추려고 했을 수도 있었다는 점도 다소간 해석의 초점으로 한 부분 정도는 차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沙門 - 意恂)


사문(沙門)이라는 말은 중을 이르는 범어(梵語)이다. 그냥 의순해도 될 일을 왜 사문이라는 어두를 사용했을까. 상대방을 향해 자신을 턱없이 낮추는 말인이며 격이 있는 낮춤의 대명사인 사문(沙門), 홍현주에게 겸손하고자, 혹은 읽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격을 낮춤으로서 동다송을 더욱 빛나게 하는 단적인 대목으로 보여진다. 스님다운, 나를 낮추면 상대는 반비례하여 월등해지는 것, 이 월등해짐이 홍현주에게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걸 간파하고 이토록 겸손했을까, 아니면 겸손함 속에 무언가 다른 뜻이 있었을까.


해거도인 홍현주는 어떤 인물인가. 홍현주(洪顯周, 1793 - 1865)는 정조대왕의 왕녀인 숙선옹주(淑善翁主) 혼인해서 영명위(永明尉) 오른 인물이다. 권력에 무임승차한 왕의 최 측근임은 당연했다. 부마로서 거칠 것 없는 위세를 가지고 있던 홍현주, 그렇다면 왜 초의(草衣)에게 홍현주는 동다송(東茶頌)을 집필(執筆)을 간(懇) 했을까.


참고로 홍현주 일가는 역사상 보기 드문 차 가족이었다. 어머니를 비롯한 형 홍석주(奭周) 홍길주(吉周), 누이 홍원주(原周) 부인 숙선옹주(淑善翁主)가 지은 차시(茶詩)가 현재까지 밝혀진 것만 2백 50수를 넘는다.


푸른 이끼에 앉아

솔잎 모아

차를 달인다.

차 한 잔 마신 뒤

시를 읊으니

꽃 사이로

흰 나비가

날아다닌다.


숙선옹주 作



효심(孝心) 또한 남달랐으니 그 효심은 차를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해 초의스님에게 차 이야기를 기록해 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다. 그것이 표면적으로 동다송이 지어지게 된 요인이었다. 차에 관한 자료가 귀했던 시절이어서 초의스님의 오랜 차 생활에서 체득한 경험을 어머니께 전해 주고 싶었던 홍현주의 효심, 하지만 동다송이 대부분 중국의 다서 중에서 발췌했다는데, 구태여 스스로 하지 않고 초의의 손을 차용했을까. 하는 의문은 무엇인가. 이 부분에서 스님이라는 격이 중요한 이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범인(凡人)이 아닌 초의스님, 당대 대 유학자 간에 교류가 깊었던 초의, 다산, 추사, 소치 등과 연관이 깊었던 그런 명성이 훗날 홍현주가 권력을 부정 못하고 권력 지향형의 ‘벼슬 구하기’로 진행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계획된 시나리오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부탁을 받은 초의스님은 당나라 때 육우(陸羽)가 지은 다경(茶經)을 탐독하는 것을 비롯해 다양한 차 책을 두루 섭렵해 직접 차를 따고 덖는 등 오랜 기간 차를 만들어 왔던 경험을 바탕으로 일종에 차에 관한 기록을 만들어냈다. 다른 다서를 참고했다면 필요한 부분의 창조가 아닌 발췌, 즉 기록이었다. 기록이라면 표제는 무엇인가? 동다송(東茶訟)! 기록이라면 스스로의 해석을 내리지 않는, 스스로의 표현이 생략된 학문적 연구서인데, 바로 이런 이면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는 표제인 동다송의 송(訟)이는 예찬의 노래를 말하는 부분의 한자이다. 모든 사람들이 따라 부르기 쉬워야 하는 노래(訟), 초의는 자신의 기록을 노래화해야 한다는 점을 홍현주에게 분명하게 전하였던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철학적 고민은 이미 증명된 것(다서의 편집)에 운율을 더하여 흥겨워야 하니 진정 하기 싫은 작업에 스스로 부어넣었을 정서는 아니었을까.



홍현주 일가가 차인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더군다나 그의 효심을 부정할 사람도 없으리라.


‘스님이 서울에 가서 해거도인(海居道人) 홍현주(洪顯周)에게 스승님(완호스님)의 비문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해거도인께서 겨울 내내 선비들과 함께 시회(詩會)를 즐기다가 보니 비문을 짓지 못하였다. 그래서 훗날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에게 부탁해서 짓고 추사 김정희의 아우 금미 김상희(金相喜)가 써서 비를 대흥사비전에 세웠다.’


스승의 비문을 부탁한 해거가 겨우 내 놀고먹었다는데, 초의 스님은 역으로 동다송을 지어 보냈다, 하는 대목에서 바로 스스로 흥겹게 작업해야 하는 이유가 숨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내가 동다송을 번역이 아닌 의역에 매달리는 이유는 이 같은 문제이다. 본질의 내면 감추고 있을 수 있는 상황을 유추하고 그것을 더듬어 진정한 속뜻을 추상해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현재(現在)까지 전해오는 조선(朝鮮) 요리책을 보면 아주 흥미로운 기록(記錄)이 남아있다. 200년 전 정조의 사위인 영명위 홍현주의 부인이 ‘임금에게 깍두기를 담가 올려 칭찬을 받았다,’ 하는 대목이 나온다. 당시에는 각독기(刻毒氣)라 불렸는데 홍현주의 부인 때문에 깍두기는 그 후에 여염집으로 퍼져나갔다.


현재에도 그렇지만 깍두기라는 낱말은 그리 긍정적인 기능으로 사용되는 예는 찾아볼 수가 없다. 어떤 본문에, 물건에 부속물로 따라가는 물건 정도로 취급하고 있는 터이다.


왕의 사위였기에 부족한 것이 없었으나, 부인의 출생부터가 공주가 아닌 옹주라는 점, 게다가 병약하기까지 했다. 우의정인 형 홍석주에 비해 중앙정치 무대에서 거의 자기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점 등에 비추어보면 그는 조선 말 유학자로서 변방, 일종에 깍두기 신세가 아니었을까. 소위 한량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던 것은 아닐까.


홍현주는 정치적으로 어떠했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당대를 호령한 문장가였던 것은 확실하다. 당시 지식인 사회가 그러했듯이, 한량이라 불리는 변방의 학자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 입신출세에 대한 염려 등, 옹주와 결혼으로 일종에 무임승차한 권세의 무상함, 자신이 얻어가는 문장가로서 위세와 더불어 무언가 부족한 한가지로 그는 고민했을 터이다.


순조 15년에 와서 종친과 외척의 예우 관청인 지돈녕 부사라는 벼슬을 지내지만, 특별한 정치적 위치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한 흔적은 보이질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는 정치적 주류로 자신의 발길을 놓을만한 위치를 찾지 못했다.


그의 외당(外堂)에는 금옥당(金玉堂)이라는 편액(扁額)이 순조(純祖)의 어필전서(御筆篆書)로 걸려 있었고, 그의 원정(園亭)에는 시림정(市林亭)이라는 익종(翼宗)의 글이 걸려 있었다. 표면적인 화려함으로 채워지는 것은 그가 지식인이었기에 한계가 있었다. 출중한 학문이 비견할 수 있는 사회적 위치가 필요했다. 권력이 혹은 바탕 없는 위세가 그러하듯이, 그 말미에는 본인을 상기시키는 법 아니겠는가. 그것은 엄청난 마음의 추락을 불러오는 법이다.


야사지만 홍현주의 아내 숙선옹주에 대해서도 성장 발육이 늦어 ‘여자 구실을 전혀 할 수 없어 홍현주를 애태웠다‘ 하는 내용도 일부 전해지고 있다. 당시 청량사(淸凉寺)는 드나들던 초의 만난 것은 그에게는 어쩌면, 익히 초의에 대한 소문이 자자해 있던 터였기에 훌륭한 돌파구였다. 문장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홍현주가 시서화(詩書畵)에 능했던 초의를 만나면서 그는 새로운 관념과 선의 세계를 알게 되었다.


초라한 행색의 초의, 하지만 안광은 빛났고, 학문은 출중했다. 그를 따르는 유학자가 많았다는데 그는 놀라웠고, 그의 문장에 압도당한 수많은 유학자의 자하, 추사, 석오 등 면면이 또한 초의를 사귐에 다툼할 정도였다. 당시 조선이 불교를 권장한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하고 생각한다면 불학을 연구하는 것이 곧 불충하는 일일 수도 있었을 터이다.


더불어 52세에 시작한 동다송을 완성하고 난후 초의가 55세 되던 해에 헌종으로부터 사호를 받는데, 아마도 그 사호를 받아내는데 홍현주의 일정한 역할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도 가능하리라. 초의를 통해 자신이 누리지 못하는 학문적 야망에 대한 대리만족 하려는 의도가 홍현주에게 조금도 없다고 장담할 사람은 없을 터이다. 물론 대의는 어머니를 향한 효심이었지만, 우리는 그런 역사 이면을 고민해볼 필요도 있다. 발상의 전환이지만 역사는 모든 가정을 열어두고 들여다보는 것도 흥미롭지 않은가. 그 시대의 초의나 홍현주로서 존재하지 않기에 우리는 가능성을 모두 참조해야 한다.


어쨌든 그런 홍현주의 초의 ‘앎’ 노력이 동다송을 현재로 전해지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부터 해석하는 동다송은 이러한 시대적 맥락을 버리지 않고 간수할 것이다. 더불어 아주 현실적으로, 현대의 우리들에게 맞게 재해석이라고 감히 명명하고 싶다. 비록 나의 실력이 미천하다 해도 그 미천함에 열정을 남김없이 소진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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