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사자(獅子)의 전설, 울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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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사자(獅子)의 전설, 울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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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7.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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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장군 이사부, 즉 지금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드라마 ‘선덕여왕’ 편에 미실의 시아버지 되는 인물이다. 이사부와 부인 지소태후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세종이었다. 지소태후는 법흥왕과 보도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적 1녀다. 우산국을 정벌한 이사부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又阿瑟羅州 《今溟州》 東海中 便風二日程有于陵島 《今作羽陵》 周迴二萬六千七百三十步 島夷恃其水深 驕傲不臣 王命伊喰朴伊宗將兵討之 宗作木偶師子 載於大艦之上 威之云 不降則放此獸 島夷畏降 賞伊宗爲州伯


아슬라주(阿瑟羅州; 지금의 명주溟州) 동쪽 바다에 순풍(順風)으로 이틀 걸리는 곳에 우릉도(于陵島)가 있다. 이 섬은 둘레 2만 6,730보(步)인데 이 섬 속에 사는 오랑캐들은 그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몹시 교만하여 조공(朝貢)을 바쳐 오지 않았다. 이에 왕은 아찬(伊飡) 박이종(朴伊宗, 이사부)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했다. 이때 이종은 나무로 사자(獅子)를 만들어 큰 배에 싣고 위협했다. “너희가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놓아 버리겠다.” 이에 오랑캐들은 두려워하여 항복했다. 이에 이종을 상을 주어 주백(州伯)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열전 이사부 조에 등장하는 기록이다.


이 부분에서 과연 이사부 장군이 살았던 500년 대 한반도에 사자가 살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생태적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교역으로서 사자를 선물로 받았거나 아니면 목격하거나 했을 수는 있다. 삼국시대는 우리의 예상 외로 엄청나게 외국과의 교역이 많았다. 인도와도 교역이 이루어졌으니 사자가 인도로부터 유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사자를 당시 우산국 사람들이 알고 있었을까. 그 어느 문헌에도 한반도에 특히 울릉도에 사자가 살았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현재도 그렇거니와 상상의 동물인 해태 상이 여러 군데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해태와 비슷하거나, 아니면 해태로 연상되는 무시무시한 동물이 존재했을지는 모르겠다.



이사부가 우산국을 복속시킨 후 신라시대를 거쳐 고려는 태조 13년 조공을 바친 우릉도(芋陵島) 주민에게 작위를 하사한다. 현종 9년에는 여진족의 침입을 받고 농업을 폐하게 되어 이를 안타깝게 여긴 조정에서 이원구 편에 농기구를 보내기도 한다. 이후 덕종 원년에는 우릉 성주가 아들을 보내어 조공하였고, 의종 11년에는 왜구의 칩임으로 고통을 받았던 우릉도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킬 계획으로 명주도 감찰사 김유립을 보내 조사하게 하였으나 실행하지는 못하였다. 조선시대 들어서 광해군 6년 대마 도주에게 울릉도에 왜인들의 왕래를 금지하는 금약을 준수하라는 서계를 보내고 숙종19년 울릉도에서 안용복 일행과 일본 어부들의 충돌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 외교 분쟁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조정에서 울릉도 정기순찰을 실시하였고, 고종 19에는 공도정책을 버리고 울릉도 개척령을 공포하여 이민을 장려하고 관선 도장을 임명하여 오늘에 이른다.



울릉도 해안을 돌다보면 남쪽 경사가 심한 계속 기슭에 있는 아름다운 "통구미어촌" 마을을 마주할 수 있다. 어촌 관광과 어업을 겸하고 있는 통구미 마을은 첫 대면부터 말끔한 것이 마치 숲속의 향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향나무 자생지가 바닷가 절벽들 사이로 펼쳐져서 천연기념물로 보호 받고 있어 절벽이나 낭떠러지 벽 위, 바위틈에서 자라난 향나무들의 모습은 천연분재 그 모습 그대로다.


통구미란 양쪽으로 높다란 산이 솟아 있고, 골자기는 깊고 좁아 마치 긴 홈 안으로 거북이가 기어들어가는 것 같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더군다나 마을 앞의 바위 모양이 흡사 거북이 같으니 애초에는 거북이 구(龜)자를 써서 통구미(通龜味)이기도 했다. 색감이 마치 물감 속에서 요동치는 듯한 맑은 바닷물의 유혹에 낚시꾼들과 스킨스쿠버 다이버들이 자주 찾는 곳이 바로 이 통구미 해안이기도 하다.



두 개의 거북이 바위가 흡사 마을의 지주목처럼 해안에 절경으로 자리 잡고 있는 통구미 마을에서 그 옛날 이규원의, 울릉도를 찬미 했던 청마 유치환의 시 구절이 절로 바람에 잡혀 다가오는 듯하다.


통구미 마을 가는 길에서 다소 어긋난 길이지만 저동항 쪽으로 움직이면 2Km 상부에 위치한 3단 울릉도 유일의 폭포를 만날 수 있다. 바로 봉래폭포다. 원시림 사이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여름 기분을 만끽하게 해준다. 1일 유량은 약 3,000톤 이상이라고 한다. 물 좋기로 소문난 울릉읍 주민들의 수원자원이다. 이 물을 모아 수력발전에 활용하기도 한다. 봉래폭포 내에는 삼나무 숲을 이용한 삼림욕장과 자연 바람이 나오는 풍혈, 울릉도의 옛 가옥구조인 너와집이 있어 주민과 관광객들의 쉼터로 유명하다. 봉래폭포 관광지 내의 너와집은 섬에서 많이 나는 솔송나무와 너도밤나무를 우물정자 모양으로 쌓고, 틈은 흙으로 메워 자체 온습도 조절이 가능하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은 따뜻한 것이 특징인 울릉도의 옛 가옥이다. 또한 봉래폭포 내의 풍혈은 땅 밑으로 흐르는 지하수의 찬 공기가 바위틈으로 용출되어 항상 섭씨 4도를 유지하므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느껴진다. 이 풍혈은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는 천연냉장고로 이용되기도 했다.



울릉도의 부속 섬 중 관음도와 더불어 가장 큰 섬으로 땅의 주인은 산림청이다. 대나무가 많이 자생해서 일명 대섬이라하기도 하고. 저동 항구에서 동북방향으로 4Km에 위치하고 있다. 면적 207,818㎡(경지 52,549m2), 높이 116m(L=619,B=365)로 현재 1가구 2명이 거주하고 있다. 섬의 유일한 진입로인 나선형 계단(일명 달팽이 계단)이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365개의 계단을 오르자면 재미를 떠나서 이 계단 때문에 죽도로 고생한다고 하여 ‘죽도’라는 별다른 애칭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울릉도의 전설이 깃든 성하신당은 태하리에 위치하고 있다. 당시의 "성황당"이 생겨난 배경은 배를 새로 만들어 바다에 띄울 때 반드시 와서 제를 올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마을 안쪽 솔숲에 있는 이 신당은 조선 태종시(1417년) 삼척인 김인우를 울릉도 안무사(按撫使)로 명하여 울릉도 거주민의 쇄환(刷還)을 위하여 병선 2척을 이끌고 이곳 태하리에 도착하였다. 태하리를 유숙지로 정하고 도내 전선(全船)에 대한 순찰을 마치고 내일이면 출발 귀임(歸任)할 작정으로 취침 중 이상하리만치 기이한 꿈을 꾸게 된다.



해신이 현몽하여 일행 중 남녀 2명(童男童女)을 이 섬에 남겨두고 가라는 계시가 있어서 안무사는 의아스럽게 생각했으나 별로 그 일에 대해서 관심이나 구애됨이 없이 다음날 출항할 것을 결심하고 날이 밝아짐을 기다리는 중 예기하지 않던 풍파가 돌발하여 출발을 중지하고 풍파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바람은 멎을 기세 없이 점점 심해 가기만 하였다. 수일간은 이렇게 기다리던 중, 안무사는 문득 전일의 현몽이 생각나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일행 전원을 모아놓고, 동남동녀 2명에게. 일행이 유숙하던 곳에 필묵을 잊고 왔으니 찾아올 것을 명하였다.



아무 것도 모르는 동남동녀 2명은 발길을 재촉하여 총총히 밀림사이로 사라지자 그렇게 심하던 풍랑은 거짓말처럼 멎어지고 항해에 적당한 바람만이 불어왔다. 안무사는 결국 일행을 재촉하여 급히 출항할 것을 명하니 배는 순풍을 받고 일시에 포구를 멀리하게 되었다. 이 무렵 속은 줄도 모르는 어린 남녀는 아무리 찾아도 필묵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냥 해변으로 돌아와 보니 배는 벌써 멀리 해상에서 순풍을 타고 육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동남동녀, 땅을 구르며 고함을 쳤으나 배는 어느 듯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원망스러워 울부짖던 두 어린 남녀는 이제는 지쳐 어쩔 수 없이 본래 유숙하던 자리로 돌아왔으나, 날이 저물어감에 따라 공포와 추위, 그리고 굶주림에 시달리다 결국은 죽어갔다.한편 안무사는 무사히 본국으로 귀착하여 울릉도 현황을 복명하였으나 당시 연민의 정과 죄의식이 마음 한구석에서 떠날 날이 없었다. 그러다 수년 후 재차 울릉도 안무(按撫)의 명을 받고 입도(入島)하여 혹시나 하는 기대에 태하리에 착륙하여 수색을 하였던 바 전년에 유숙하던 그 자리에 두 동남동녀가 꼭 껴안은 형상으로 백골화(白骨化)되어 있었다.


안무사는 이 정황을 보고 회한에 젖어 혼령을 달래고 애도하기 위해 신당을 짓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매년 음력 2월 28일에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며 농작이나 어업의 풍년도 소원하고 위험한 해상작업의 안전도 빌었다. 그리고 신조 선박의 진수식이 있으면 꼭 태하의 성하신당(성황당)에 제사하여 해상작업의 무사안전과 사업의 번창을 기원한다.



울릉도에서도 황토가 난다. 바로 이 동남동녀의 전설이 전하는 태하리 해안이다. 고려 조정에서는 울릉도에 자주 관리를 보내서 섬의 관리 실태를 파악하고자 했다. 하지만 풍랑이 심하고 길이 험했던 관계로 조정에서 임명된 관리는 주로 영덕이나. 포항 등지에서 며칠 유숙하면서 조정에는 거짓 보고를 하곤 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궁여지책으로 임명된 관리에게 이 태하이 황토를 퍼오게 하였다고 한다. 태하는 원래 황토가 많이 난다 하여 황토구미로도 불리운다. 삼척의 어느 사또가 관기와 선유놀이 갔다가 돌풍에 휘말려 울릉도에 표착하는데 석달 열흘을 먹을 게 없었던 일행이 이 황토를 먹고 연명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북면 현포는 해상 쉼터이다. 송곳봉의 바람이 현포에 와서 인자해진다고 하니 현포 방파제에서 내려치는 저녁노을은 가히 경탄을 자아낸다. 꿈틀거리는 파도에 해적거리는 저녁노을은 산등자락에서 기울어진 크기만큼 그늘로 휘감겨가니 바다가 색채의 율동만큼 검어진다. 그래서 검을현(玄)의 문자를 달고 있는 현포 항구이다. 낮게 깔린 어둔 색채에 내려치는 노을, 송곳봉, 그리고 바다 저 먼 곳의 코끼리 바위. 울릉도의 비경의 절정이 바로 여기에 머문다.



화산섬 울릉도가 만들어낸 나리분지. 다른 화산섬의 중심, 백두산에는 천지, 한라산에는 백록담처럼 호수가 생겨났으나 울릉도는 커다란 평지를 만들어냈다. 주변이 물이 흐를 수 있도록 경사도가 깊은 것도 이유가 되지만 어쨌든 섬 중심의 분지는 주로 농토가 드넓게 펼쳐져 있으니 마치 그 동안 보아왔던 섬의 풍경과는 다른 세상에 들어선 것 같다. 여기저기 무변하게 펼쳐지는 분지는 나리꽃이 가득하다. 그리고 산을 중심으로 헤아려지는 구름과 해무들은 신령스러워 비경이 따로 없다, 각종 산나물과 더덕, 평화롭고 고요한 대지에 내려앉은 작은 꽃잎 같은 평화가 느껴진다. 모든 물상이 완만하여 그림자 같으니, 아주 작은 바람에도 춥지도 덥지도 않는 분지만의 소요가 가득하여 저절로 산을 굽어보게 되는 것이다.



신라의 이사부가 동해의 풍랑을 헤쳐가면서 우산국 정벌에 나설 때 1천 5백년 후의 우리들에게 남겨놓은 것은 비단 울릉도의 황홀한 절경만이 아니라, 이 국토가 우리민족이 가야 할 혼의 터전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나리분지 곳곳에서 만난 모든 물상이 울릉도의 역사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서 느껴지는 평화였다. 더불어 울릉도가 품고 있는 이색적, 특질적 문화의 향수로 다가서는 것이 아닌 진정 발길이 머무는 곳에 느껴지는 아름다운 경치, 그리고 전설 그게 이사부가 1천 5백 년 전에 우산국을 복속시킨 진정한 사자의 포효였을 터이다. 우리의 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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