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방위의 의지, 손돌목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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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방위의 의지, 손돌목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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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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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 1866년 초봄, 미국의 해병 ‘제너럴셔먼’호는 일방적으로 평양으로 진격해와 통상을 요구했다. 조선에서 이를 단호히 거부하게 되고, 미국측은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죽였다. 이에 평양감사 박규수는 화공으로 맞대응하여 셔먼호를 침몰시켜버리게 된다. 재차 1871년 5월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가 쳐들어왔다. 바로 신미양요다. 정부의 승인으로 군함 5척 해병 1230명 대포 85문으로 중무장을 한 로저스 제독은 ‘손돌목’에서 포전을 갖고 최초 6월 16일 강화도 초지진에 상륙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광성보 전투이다. 조선군 전사 43명, 부상 24명, 어재연 장군의 사망. 미군측은 전사 3명 부상 10명. 로저스 제독은 조선의 결사항전 의지를 알고 조선을 개항 시키려는 의지를 접고 후퇴하였다.





▲ 광성보에서 내려다 본 손돌목


손돌목은 강화 앞바다에서 마포나루까지 올라가는 길목으로 강화군 대곶면 신안리에서 광성진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이다. 평상시에는 세곡미를 운반하는 뱃길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전시에는 적을 방어하는 진지로 사용되었다.

여서지도 고적조에는 ‘손돌’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록이 있다. ‘광성진에 위치한 손돌 항은 암초가 많아 뱃길이 매우 험난하다. 월변 통진 근처의 강기슭에 언덕이 있고 그 위에 손돌 총이 있다.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은 반드시 제를 올리고 무사히 건널 것을 기원했다. 구설에 고려 공민왕이 몽고 군대에 쫓기어 바다로 나아가 섬으로 피신하고자 배를 타고 나아갈 때 손돌이 고사가 되어 배를 몰아 갑곶진에서 광성에 다다르자, 바닷물이 선회하고 왼쪽도 오른쪽도 막히고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욱 더 길이 가리워져 앞길이 없는 것과 같았다. 왕이 크게 노하여 이는 손돌이 나를 속여 험지로 유인한 것이라고 생각해 참수할 것을 명하였다. 뱃사람들이 그의 시체를 강변에 묻고 그 땅을 손돌항이라 이름 붙였다. 무덤의 형태는 지금도 완연하다. 바닷가 사람들은 매년 10월 20일에 풍랑이 있음을 미리 알았는데, 이는 모든 사람들이 이날(10월 20일)을 손돌이 형은 받은(죽음을 당한) 날이라 여겨서 말한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손돌목 바위


진도의 울돌목과 버금갈 정도로 빠른 물살, 세시풍속에 의하면, 동절기에 속하는 음력 10월 20일을 전후해서 부는 바람을 '손돌바람', 이때의 추위를 '손돌추위'라고 부른다. 10월 20일 손돌이 억울하게 죽어 그 날이 되면 바람이 세게 불고 추위가 매우 극력하므로 뱃사공은 경계를 하고, 집에 있는 사람도 털옷을 준비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보면 몽고의 침입에 의해 강화도로 피신하는 왕이 고려 공민왕이 아닌 23대 고종이었다. 전설은 구전이 대부분이므로 허구 내지 과장되게 묘사된 것이다. 어쨌든 ‘손돌’은 왕이 자신을 참수시키려 하자, "뱃길 앞에 바가지를 띄우고 그 바가지"를 따라갈 것을 간언한다. 이 바가지를 따라가자 길이 열려 왕은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광성보 전적지 기념비


손돌의 전설과 함께 강화를 통해 조선을 침략하려 했던 프랑스 군대와 미군 군대에 최초 전진기지, 바람은 세차고, 그 곳은 지나는 물길은 여울이 너무 심해 숙력된 뱃사공 아니면 지날 수 없었던 역사의 방어벽, 손돌목을 지키고 있는 노송 사이로 도도한 물길은 역사의 현장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강화해협을 지키는 12진보 중 가장 규모가 큰 광성보, 고려의 강화 천도로 쌓았던 성, 그 광성보 중간에 가장 중요한 거점의 요새라 할 수 있는 손돌목, 국방유적의 산실로, 어재현 장군의 위령비와 무명용사의 위령비가 아직도 못다한 국토방위의 엄중한 사명 속에서 역사의 페이지 한 대목을 넘겨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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