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匠人] 부처의 미소를 만드는 장인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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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匠人] 부처의 미소를 만드는 장인의 손
  • 관리자
  • 승인 2009.10.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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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형,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불상 조각장이다. 쌍계사 방장스님이었던 고산 스님으로부터 여진(如眞)이라는 계를 받은 유발상좌(有髮上座, 머리를 기르는 스님)이다. 그러니 그는 엄연한 불교인이다. 불가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그는 불상을 조각하면서 스스로 느낀 지혜의 크기만큼 더욱 인간과 자연에 깊어지는 것이 진리라고 한다. 여진불교미술관(如眞佛敎美術館)을 통해서 사바대중과 불심의 통로인 조각이라는 예술을 승화시킨 이진형 장인, 불상조각은 대전시무형문화재 제 6호로 지정된 중요한 자산이기도 하다.






▲ 이진형 불상조각장


“이러저러한 인연으로 돈을 벌었어요. 그게 모두 부처님의 공덕이라 생각해서 평생에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여진 미술관이라는 불교미술관을 만들었습니다. 이게 어디 제 것입니까. 늦어도 올해 말, 아니면 내년 초에는 대전시나 불교 재단 등지에 기부할 생각입니다.”


최근 ‘53 선지식 동자전’을 통해서 전문 지식인들의 성공을 통해 선지식이 무엇인지 동자상으로 표현하여 묻고 있는 전시회를 열고 있었다. 선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전문화된 직업으로 성공한 사람들, 그들의 가치를 올곧게 실현하는 방안으로 동자상을 캐릭터화 한 것이다.






▲ 여진불교미술관


“불교에서 동자상은 보살의 화연으로 순진무구한 동심의 이미지로 표현됩니다. 스님이 되기를 염원하는 4세에서 8세까지의 미성숙한 동자들을 통해 바라보는 순수의 세계, 이것이 곧 불심의 기원이죠.”


이진형 장인의 손끝에서 태어난 동자상은 2002년 FIFA 월드컵 기념 동자를 비롯해서 산신동자, 학자, 염원 등 여러 주제도 각양각색이다. 동자상은 사실 조선 후기의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붓이나 두루마리를 들고 중생들의 악행이나 악업을 기록하는 선악을 구분 짓는 모습이었다. 주로 소조나 목조 드물게는 석조 등이 소형동자가 표현 되었는데 이런 선악의 경계 선상에 동자란 곧 욕심, 허욕의 모든 인간적 욕심을 부질없다고 말하는 것의 원천이었다. 동자란 결국 불심의 완성이기도 한 것이다.






▲ 전시 중인 동자상


대전광역시 유성구 탑립동 초입의 여진불교미술관은 2001년 빚까지 얻어서 부지를 매입해서 이진형 장인의 손끝으로 일일이 복토하여 조성했다. 이곳은 불교미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참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처음 부지를 매입하여 현장을 둘러볼 때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는 이진형 장인, 꼬박 3개월을 무성한 아카시아 나무를 손수 벌목하면서 일을 끝낸 후 도저히 온몸이 쓰리고 아려서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한다.


“소주 1병과 맥주 1병을 큰 양푼으로 따라서 단숨에 몸속에 들이붓고 나서야 겨우 잠을 이를 수가 있었어요. 그렇게 3개월을 꼬박 아카시아 나무를 베어나고 나니 이제는 개를 키우던 사육장이던 까닭에 온 산에 개똥 범벅이었습니다. 일일이 복토를 하기를 몇 차례, 이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온몸이 쿡쿡 쓰시고 아리는 것 같아요.”


온갖 고초 끝에 2005년 10월 14일 여진불교미술관을 개관하였다. 사방 너른 들에 아름다운 조경과 불심 가득한 소조, 삼천불석가여래, 천수천안관세음보살, 사방불, 반야용선, 초전법륜지, 약사불과 12지신, 아미타불, 무형문화재전수회관, 휴게실 공간 등으로 화려한 변신을 거듭해온 여진 불교 미술관은 이제 불교인이라면 한번은 들려야 하는 순례 코스가 되었다.




▲ 전시 중인 불상


"모든 공간에 부처가 존재하며, 본래 중생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듯이, 눈길 닿는 곳마다 부처님이 있는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어 성불하기를 기원합니다."라고 하는 이진형 장인이야 말로 유발상좌의 기본을 걷고 있는 진정한 불심의 소유자가 아니던가.


14살 무렵, 가난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고향 부여에서 무작정 상경해서 당시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나무인형공장에 취직하게 된 이진형 장인, 이후 가평에서 만난 김상인, 이금수, 김재윤 등을 스승 겸 동료로 배우던 시절, 그는 모든 사람들이 퇴근한 후에도 나무 인형 만들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남 몰래 배운 솜씨지만 손재주가 남달랐던 이진형 장인은 사장이었던 신진호씨에게 발탁되었고, 신진호 사장이 공장을 가평에서 서울 근교로 옮겼을 때 함께 극동 공예를 만들었다.


"극동 공예사 시절 겨우 18살 나이에 직원을 120명 거느린 공장의 공장장이었어요. 당시 신진호 사장이 저를 무척 아꼈지요. 그리고 그 당시 현덕문이라는 분을 만난 게 저에게는 행운이었어요. 그 분은 그림을 아주 잘 그렸거든요. 그 분의 밑그림으로 인형이 만들어진 것이죠."


극동 공예사 하면 별다른 수출품이 없던 당시에 가내 공업 형태의 민속 수공예품을 전량 해외 수출하거나 유명 백화점, 반도아케이드 같은 곳에서 한국을 알리는 관광 상품을 만들던 곳으로 국내 최대 규모였다.




▲ 전시 중인 불상


하지만 이진형 장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극동 공예사와 현덕문 씨가 갈라지게 되면서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이진형 장인도 극동 공예를 그만두게 되었는데, 더군다나, 가내 수공업 중심의 수출품이 서서히 사양길로 접어든 것도 원인이 되었다.


불교와의 인연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수공업 중심의 기능공에 대한 대우가 현저하게 열악해 질 무렵 그는 뜻 밖에도 내원정사 정념 스님으로부터 불상 조각 의뢰를 맡게 된 것이다.


"막 결혼해서 살 길이 막막해질 무렵이었는데 뜻 밖에도 정염스님에게 연락이 온 것이에요. 스님을 만나 뵈니 일만 잘하면 6개월마다 월급을 올려준다는 말에 얼마나 기뻤는지, 애 낳은지 일주일도 안 되어서 보따리 싸들고 부산으로 내려갔어요.”


분명 인연이었다. 그 뒤로 내원정사의 모든 불상과 목조 조각은 이진형 장인의 손끝에서 완성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고산 스님과의 인연, 더불어 현재까지 3,500여 부처님을 이진형 장인은 자신의 손 끝으로 완성시켜 전국 사찰에 모시기에 이른다. 이것은 분명 인연이라고 몇 번을 걸쳐 강조하는 이진형 장인은 부처님으로부터 얻은 것은 모두 중생들과 나누는 것이라고 앞으로 미술관 재산의 모든 것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다짐을 멈추지 않았다.




▲ 불상 수인


불교를 통한 전통문화를 계승하여 문화의 뿌리를 알리고 있는 여진미술관 이진형 장인, 세상의 참다운 이치로 거듭나는 공간으로 모든 국민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도록 여생을 바칠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사람다움의 부처의 가르침이라는 말로 다시 조각칼을 들어 부처님의 자애로운 미소 끝을 되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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