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마지막 왕의 전설, '빈대궐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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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마지막 왕의 전설, '빈대궐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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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1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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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양의 지리산 자락, 몇 해 전 오도재의 길이 포장되기 전까지만 해도 함양 촉동마을은 오지 중 오지였다고 한다.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서는 함양장까지 오도재와 지안재를 넘어 30리 길을 갔다고 한다. 이 마을 뒤쪽에 유난히 뾰족한 촉대봉이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어 촉동마을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런 산골 마을에 가야와 신라의 유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지리산 자락을 바라보고 있는 촉동마을에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이자 김유신의 증조부인 구형왕(仇衡王)의 전설적 발자취가 남은 곳이 있다.





▲ 촉동마을에서 본 지리산 자락


가락국의 마지막왕인 구형왕에 대한 내용은《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본기> 법흥왕 19년조에 의하면 "금관국의 임금 김구해(金仇亥, 구형왕)가 왕비와 세 아들인 노종(奴宗)·무덕(武德)·무력(武力)과 함께 국고(國庫)의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적혀 있고, 또한 "금관가야가 멸망하자 신라는 이들을 예로 대접하여 왕에게 상등(上等)의 벼슬을 주고 그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고 적혀있다. 이렇듯 역사에는 구형왕은 평화적으로 가야를 신라에 존속시키고 자신은 신라의 귀족이 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새롭게 포장된 오도재를 지나며 본 산신각에는 역사의 기록과는 다른 지역 이야기가 기록되어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 구형왕의 전설이 전해지는 석벽


가락국 제 10대 구형왕은 서기 532년 신라가 침공하자 선량한 백성을 전쟁의 제물로 삼을 수 없다 하여 나라를 신라에 양도하고 9만 대군을 거느리고 함양의 제한역(蹄閑驛) 아래 와서 머물렀다. 그리고 오도재 너머 촉동에 대궐터를 잡아 역사(役事)를 시작했으나 적을 방어하기 어려운 지형이라 칠선계곡으로 들어가 추성(秋城)을 쌓고 피란하였다 그때 9만 대군이 머물렀던 곳을 대군지(大軍地)라 하며 구만동(九萬洞)이란 마을이 형성되었고 활개미란 곳은 활을 쏘며 무술을 연마했던 곳이다. 촉동에는 빈대궐터가 있고 추성에는 석성과 대궐터, 파수대, 뒤주터 등 옛날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곳 오도재는 마천, 하동, 구례로 통하는 고갯길이었는데 구형황후인 계화부인(桂花夫人)이 올라와 제단을 쌓고 망국의 한과 선왕의 명복을 빌었다. 그로부터 성황당이 생기고 지나가는 길손이 기도하고 주민과 무당들이 지리산의 천왕신을 모시고 제를 지내던 곳인데 퇴락하여 이를 복원하고 비를 세운다. - 오도령 산신각





▲ 구형왕의 전설이 전해지는 석벽


위의 기록에 따르면 구형왕은 신라에 항복하기는 했으나 지리산 자락 함양에 터를 잡고 다시 가야의 부활을 도모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에 방문한 촉동 마을 주변은 빈대골이라 불리는데, 이는 빈 대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주변에는 구형왕이 신라에 대항하여 구만(九萬) 병사를 양성했다는 구만 마을, 활을 만들던 곳으로, 활을 개민다(감는다)는 뜻으로 할개미 등 구형왕과 연관된 많은 지명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축동마을에는 또다른 구형왕에 대한 전설이 전해져 오는데 그 내용 아래와 같다.





▲ 구형왕의 전설이 전해지는 석벽


가락국 수로왕으로부터 구형왕까지 열 왕이 이어오면서 491년에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하였음. 전설에 의하면 구형왕(일명 양왕)이 신라에 양국(나라를 건네줌)하였다 하여 후인이 양왕이라 칭함. 신라에는 항복하였으나 불신지의를 품고 지리산 깊은 곳에 은거하매 신라에서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왕의 거소에 대궐을 지어 거처케 하였으나 토적의 침범이 심하므로 왕이 부득이 단신으로 산청 왕산을 향하여 도피하던 중 그곳에서 승피하므로 추종자들이 돌을 모아 능을 쌓아 지금까지 전하고 당초 대궐은 빈대궐이라 칭하고 있다.





▲ 석벽의 동굴 입구


구형왕이 가야의 복원을 위하여 축성하였든, 신라에서 구형왕을 위하여 대궐을 지었든, 현재 촉동마을에는 성벽과 같은 담장이있다. 또한 이 곳에는 서기 656년 신라 무열왕 때에 구형왕의 궁궐터에 등구사(登龜寺)라는 절을 창건하였다고 전해져오는데, 지금은 작은 절만 남아있다. 등구사 터 아래엔 튼튼한 성벽같은 담장이 둘러쳐져 있고, 글자가 새겨진 아래에는 인공적인 굴이 있다. 전설에는 구형왕이 피신했던 동굴이라고 하는데, 수로로서 활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이유는 500여년 전 김일손이 쓴 《속두류록》에 의하면, "신마(信馬)로 등귀사(登龜寺)에 당도하니 산의 형상이 소복하여 거북과 같은데, 절이 그 등에 올라 있다하여 이름이 된 것이다. 옛 축대가 동떨어지게 높고, 축대 틈에 깊숙한 구멍이 있어 시냇물이 북으로부터 내려와 그 속으로 쏟는데 소리가 골골한다."라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 굴은 30여m 이상 깊게 뚫려있는데 중간에 무너져 있어 자세한 조사가 필요할 듯 보였다.





▲ 석벽의 동굴 내부


또한 등구사터에는 9세기 신라시대에 조성된 3층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1979년 장충식 교수에 의해 학계에 알려졌는데, 당시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고 도굴 흔적이 뚜렷하며, 석탑의 윗 부분이 많이 훼손되어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당시 장충식 교수의 발표자료에 따르면, 이 탑과 동류의 석탑으로는 "팔공산 동화사 금당암서3층석탑"을 예로 들 수 있다고 하였고, 이 석탑의 의의로는 "경주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던 신라의 문화권은 삼국통일을 계기로 차츰 지방에까지 여력을 미치게되었다"는 중요한 자료이라고 했다. 실제로 이탑의 기술적, 예술적인 면을 살펴보면 그 기능이 신라시대 지역장인의 솜씨가 아닌 경주지역 장인의 솜씨와 같다고 한다.





▲ 등구사지 3층석탑


구형왕의 전설이 있는 성벽과 그 위에 있었던 신라시대의 사찰의 터가 남아있는 지리산 축동마을 주변은 땅만 조금만 파도 기와, 자기 등 유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또한 성벽의 굴에는 후대의 사람들이 "남산김씨묘동"이란 글자를 입구에 새겨넣어 심하게 훼손되어 있는 실정이다. 근처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석탑의 탑신과 기단석이 널려 있는 등 주변에 대한 학술적 조사가 시급해 보였다. 아직 이 지역에 대한 학술적 조사가 미흡하여, 유적과 유물에 대한 보다 구체적으로 밝혀진 내용이 없다. 가야의 마지막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도 있는 설화와 성벽이 있고, 신라시대의 주요 사찰의 터가 있는 함양의 촉동마을 주변에 대한 보다 체계적, 구체적 연구가 진행되어, 지리산의 아름다움과 문화유산의 풍부함이 함께 있는 지역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 촉동마을 주변에서 나온 유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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