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을 잇는 호국도량 진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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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을 잇는 호국도량 진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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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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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사(津寬寺)



지난 5월, 서울 진관사(津寬寺) 칠성각 해체복원 과정에서 불에 탄 흔적이 있는 3.1운동 당시 태극기와 독립운동 관련 신문자료가 발견됐다.



발견된 유물들은 1919년 상해 임시정부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와 상하이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신채호가 상하이에서 발행한 '신대한신문', 독립운동 참여를 권고하는 경고문, 기록으로만 전해지다가 처음 실물이 확인된 자유신종보 등 총 17점이다.







▲ 진관사 에서 발견된 태극기 / 문화재청



왜 진관사에서 이러한 유물들이 발견된 것일까?



독립기념관 연구소의 김용달 연구위원은 발견된 유물과 여러 스님들의 증언을 토대로 추정해 볼 때 당시 불교계와 진관사, 그리고 진관사에 주재하던 백초월 스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독립운동 과정에서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는 의견을 밝혔다.



백초월 스님은 1919년 3.1운동 당시 비밀단체 한국민단본부를 조직하고 ‘혁신공보’라는 독립신문을 간행하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물로, 진관사에 주재하며 임시정부와 독립군을 지원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여 전달했다.



김용달 연구위원은 신문의 날짜를 확인한 결과, 각각 1919년 7월과 1920년 2월에 상해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신상완 스님을 만나 태극기와 신문 등의 자료들을 전달받은 것으로 보인다며, 이는 두 스님이 함께 제2차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고, 진관사 승려들을 비롯한 불자들을 규합하여 의용승군을 조직하려다 일경에 피체된 사실로도 증명된다고 밝혔다.







▲ 진관사에서 발견된 독립신문(좌)과 자유신종보(우)/문화재청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연구소 김주용 연구원, 김광식 교수(부천대학교)도 당시 진관사 백초월 스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긴밀히 협조하는 과정에서 진관사가 국내외를 연결하는 거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의견을 같이했다. 그러나 관련 연구의 부족으로 진관사의 독립운동에 대해서 정확하게 밝혀진 부분이 많지 않아 향후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의견을 내놓았다.



아직 불교계의 독립운동 관련 연구가 크게 진척되지 못한 실정에 비추어 볼 때, 진관사에서 발견된 태극기 및 신문 사료들은 진관사를 비롯한 불교계의 독립운동에 대해 규명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다. 유물 발견을 계기로 백초월 스님과 진관사, 그리고 불교계가 독립운동사에서 갖는 역사적 위상을 재점검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진관사(津寬寺)

진관사는 고려 제8대 현종이 1011년에 진관대사를 위해 창건해 현재까지 천년의 맥을 이어온 사찰이다. 고려 역대 왕들이 참배한 국찰이자 조선시대 국가적 수륙재(水陸齋)가 열리는 사찰로서 오랜 세월 전성기를 누렸으나, 6.25 때 나한전 등 3동을 제외한 건물들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 진관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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