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학자이자 국문학자, 이병기 선생을 느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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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학자이자 국문학자, 이병기 선생을 느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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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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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 이병기(李秉岐) 선생의 생가는 1973년 6월 23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된 곳으로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에 위치해 있다. 시조학자이자 국문학자인 이병기 선생이 태어나고 생활하던 곳이다. 생가에는 수령 200여년으로 추정되는 높이 5.2m에 달하는 탱자나무가 있는데 이것 또한 전라북도 기념물 제 112호로 지정되어 있다.





▲ 가람 이병기 선생 동상


이병기 선생은 1891년 3월 5일 연안이씨 채(採)의 아들로 태어나 1913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보통학교 교사를 지내면서 고문헌 수집과 시조연구에 몰두하였다. 이후 1925년 ‘조선문단’지에 ‘한강을 지내며’라는 시를 발표하며 시조시인으로 출발하였고, 한국고전의 주석 및 연구논문을 발표하는 등 국문학자로서의 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이듬해에는 최초로 ‘시조회’를 만들었다. 그는 시조의 현대적 혁신과 부활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고전의 발굴 연구에 힘썼다. 아울러 청소년 교육을 통한 민족의 말과 글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로 인해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1년에 가까운 세월을 복역하게 되었고, 1943년 가을 기소유예로 출감하여 고향에 돌아와 농사와 고문헌 연구에 몰두하였다. 1945년에 광복이 되자 상경하여 대학에서 국문학 강의를 하였다. 또한 국문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분석한 ‘국문학전사’, ‘역대시조선’, ‘가람문선’ 등을 저술하였으며 수많은 고전을 발굴하고 주해하였다. 1968년 11월 28일 이곳에서 영면하였다.





▲ 가람 이병기 선생 생가


가람 이병기 선생의 생가는 소박하게 지어져 있다. 안채·사랑채·고방채(창고의 기능을 하는 고방을 따로 집으로 지은 것)·모정(짚이나 새로 지붕을 이은 정자)으로 이루어져 있고, 뒤쪽에는 일꾼을 위한 외딴채가 있다. 입구에 있었던 행랑채는 몇 해 전 철거하여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모정의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옆에 탱자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소박하지만 고풍스러운 멋을 풍기고 있으며, 모정과 못을 배치하는 등 조선 후기 선비 가옥의 조촐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 전라북도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된 탱자나무


비록 화려하거나 볼거리가 많은 곳은 아니지만 잠시만 이곳에 머무른다면 조선후기 가옥의 소박한 멋과 이병기 선생의 올곧았던 선비정신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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