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명필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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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명필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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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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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은 2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 ‘우리나라의 옛 글씨(조선 후기의 명필)’를 대상으로 보물 지정을 위한 일괄공모를 시행한다고 1일 밝혔다.

‘일괄공모사업’은 해당 분야의 비중에 비해 지정이 적극적으로 이뤄지지 않은 분야의 작품을 직접 발굴하여 보물로 지정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2009년에는 ‘조선전기의 명필 및 어필’을 대상으로 공모하여 모두 20건의 서예작품을 보물로 지정하였다. 이 사업은 2005년부터 문화재청에서 직접 추진 중이며, 현재까지 93건의 보물을 지정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번 일괄공모 대상은 17세기에 활동한 이지정·허목·조속·윤순거·송시열·송준길·이수장·이서, 18세기에 활동한 윤순·이광사·이인상·강세황·조윤형·이한진·정약용, 19세기에 활동한 유한지·이삼만·신위·김정희 등 조선 후기 명필의 서예작품이다.





▲ 2009년 일괄공모를 통해 보물로 지정된 양사언초서


이번 일괄공모의 대상 선정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지정(1588~1650)은 초서와 예서에 능하고, 조선 전기의 명필 황기로(黃耆老)에게서 서법을 배워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허목(1595~1682)은 그림·글씨·문장에 모두 능했으며,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조속(1595~1668)은 시·서·화 삼절로 일컬어 졌으며, 역대 명필들의 친필과 금석문의 수집활동을 시작해 이 방면 선구자로 꼽힌다.
윤순거(1596~1668)는 문장과 글씨에 뛰어난 학자로, 여러 저서와 비문 등이 전하고 있다.
송시열(1607∼1689)은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발전시킨 예학의 대가였을 뿐 아니라 문장과 서체에도 뛰어나 예스럽고 힘이 넘친다는 평판을 받았다.
송준길(1606~1672)은 송시열과 함께 서인의 영수로서 특히 예학에 밝았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여 저서와 비문 등을 남겼다.
이수장(1661~1733)은 해서와 행서에 능하였으며 왕희지의 필법을 익히고 만년에는 서학(書學)의 원류를 정리한 ‘묵지간금(墨池揀金)’을 지었다.
이서(1662~?)는 성호 이익의 형으로 글씨를 잘 썼는데, 진체(晉體, 왕희지의 글씨체)의 필법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의 필법을 계발하여 “동국(東國)의 진체(眞體)는 옥동(이서의 호)에서 비롯되었다”는 찬사를 받았다.

윤순(1680~1741)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글씨의 대가로 우리나라의 역대 서법과 중국서법을 아울러 익혀 한국적 서풍을 일으켰다.
이광사(1705~1777)는 윤순의 문하에서 필법을 익혔고 글씨에서 독특한 서체인 원교체(圓嶠體)를 이루어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인상(1710~1760)은 시문과 학식이 뛰어나 후대의 문인과 서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글씨 중 해서체는 안진경을 따랐고, 전서체는 마음 내키는 대로 호기롭게 썼다. 김정희는 그 문자향을 높이 사 “전각은 200년 이래로 따를 자가 없다”고 평가하였다.
강세황(1713~1791)은 남달리 높은 식견과 안목을 갖춘 사대부 화가로서 스스로 그림제작과 화평(畵評)을 통해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 중추적인 구실을 한 인물이다.
조윤형(1725~1799)은 풀·대나무 등의 묵화를 잘 그렸고, 글씨는 초서·예서를 잘 써서 일찍이 서사관(書寫官)을 역임하였다.
이한진(1732~?)은 전학(篆學)에 뛰어났는데 당나라 이양빙의 소전(小篆)을 따랐다.
정약용(1762~1836)은 실학의 대가로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현전하는 글씨와 인장이 있다.

유한지(1760~?)는 전서와 예서를 잘 써서 일대에 이름이 높았던 명필이다.
이삼만(1770~1847)은 어린 시절에 당대의 명필이었던 이광사의 글씨를 배웠고 많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초서를 잘 썼으며 그의 서체를 창암(이삼만의 호)체라 하였다.
신위(1769~1845)는 중국 당대 대학자 옹방강과 교유하였으며, 시·서·화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글씨는 동기창체(董其昌體)를 따랐으며, 조선시대에 이 서체가 유행하는데 계도적 구실을 하였다.
김정희(1786~1856)는 박제가의 제자로 중국의 옹방강·완원 등의 거유와 교유하며 경학·금석학·음운학·지리학 등에 조예가 깊었다.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예술성(특히 서도)을 인정받았고 20세 전후에 이미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으며, 중국 연경에 가서 명유들과 교유하고 많은 친필을 감상하였다. 그의 독특한 서체인 추사체는 타고난 천품에다가 무한한 단련을 거쳐 이룩한 고도의 이념미의 표출로 평가되고 있다.





▲ 2009년 일괄공모를 통해 보물로 지정된 정조어필


이번 공모에서 제외되는 것은, 간찰(簡札, 편지)·서적·문서류와 같이 순수 감상용이 아닌 일상적 용도로 쓰인 글씨, 직접 필사(筆寫)되지 않은 판본 등의 글씨(탁본· 현판·각자(刻字) 등), 훼손 상태가 심하여 자료적 가치를 상실한 글씨이다. 공모 대상을 이처럼 제한한 것은 타 유형의 문화재에 비해 상대적으로 현존 수량이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 서예류의 효율적인 조사를 위한 것으로, 이번 공모 대상에서 제외된 서예류는 지방자치단체를 거치는 통상적 절차에 의해 문화재 지정 신청이 가능하다.

이번 일괄 공모는 해당 문화재를 소유하거나 관리하는 개인이나 단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신청할 수 있으며, 자세한 내용과 신청 방법은 문화재청 홈페이지(http://www.cha.go.kr)를 참고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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