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20 특집」타국에서 우리 것 찾기 - Part1. 日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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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0 특집」타국에서 우리 것 찾기 - Part1. 日本
  • 관리자
  • 승인 2010.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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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0 서울 정상 회의가 있는 11월을 맞이하여, 각 국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문화재들을 조금 살펴보고자 한다.


그 중 필자가 가장 먼저 선택한 곳은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日本)이다.






▲ 4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일본


일본은 아시아 대륙 동단의 북태평양에 위치하고 있는 총 4개의 섬(훗카이도(北海道), 혼슈(本州), 시코쿠(四國), 규슈(九州))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걸로 일본의 지리적 표현을 다 했다면 큰 오산이다. 바로 우리나라의 제주특별자치도, 울릉도, 독도와 같은 부속 도서 지역 오키나와(沖繩)도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바로 일본과 다른 또 다른 느낌의 일본, 오키나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 오키나와 슈리성


일본 가장 최남단에 위치한 오키나와는 규슈와 대만의 중간 정도에 위치해 크고 작은 100여 개의 섬으로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는 류큐왕국(琉球王國)의 옛 성 ‘슈리성(首里城)’ 등과 같은 여러 문화유적들이 자리하고 있어 특히나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약 2시간가량 비행기를 타고 가야하는 이곳은 12세기부터 몇 개의 집단이 세력을 다투다가(삼산시대-남산, 중산, 북산) 1429년 쇼씨왕가가 이 집단들을 하나로 통일해 15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약 400년 동안 “류큐왕국”이라는 독립적인 국가로 살아왔다고 한다.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잇는 해상로에 위치하고 있어 우리나라와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아 독특한 문화를 이룬 이 국가는 약소국으로 오랫동안 청나라에 조공을 받쳐 왔다고 한다. 그러다 중국 세력이 약해질 무렵인 1609년 일본 가고시마현(鹿兒島縣)의 시쯔마번(鹿兒島縣)에서 자주 침략을 해오다 그들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덕에 큰 부를 창출한 시쯔마번은 메이지 유신의 가장 큰 역할을 해냈다고 한다. 어찌되었건 일본의 무력으로 1895년 일본과 병합이 된 이 국가는 세계2차대전을 거치면서 약 27년간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마치 우리나라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함께 적어나간 느낌이 강하게 들어 만약 우리나라도 독립을 하지 못했다면 오키나와와 같은 모습을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나라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받치신 우리 선조 분들게 허리 숙여 깊이 감사드린다.






▲ 오키나와의 명물 시사(수컷)


이야기가 잠시 다른 길로 빠졌지만, 이런 아픈 역사를 겪은 이유로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와는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날씨 또한 연간 평균기온이 22.7℃로 최저기온이 20.5℃일만큼 매우 따뜻한 아열대낙원이다. 이곳의 문화가 다르다는 것을 단박에 느낄 수 있는 것은 오키나와에 사는 거주민들의 언어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오키나와에 자리한 흰 벽의 붉은 기와, 그리고 그 위에 자리한 시사(獅子)라는 사자이다. 오키나와 전설의 동물로 지붕이나 문, 현관 등에 올려두면 재앙을 막아준다고 해서 오키나와의 모든 건물 위에 시사가 암수(입을 벌린 것이 수컷, 입을 다문 것이 암컷) 한 쌍씩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그들의 과거의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는 것처럼. 그래도 오랜 시간 문화적 격동이 있어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었고, 그것의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바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구수쿠 유적 및 류큐왕국 유적”이다.






▲ 슈리성 베자이텐도


구수쿠 유적 및 류큐왕국 유적이자 류큐왕국의 옛 성 슈리성은 옛 류큐왕국의 수도이며 현재 오키나와의 정치, 경제, 교통의 중심지인 오키나와 본도의 나하(那覇)시에 위치해 있다. 하늘과 바다의 현관(玄關)이라 불리 우는 나하. 그러나 1945년 3월 26일 “철의 폭풍”이라는 오키나와 전쟁(세계제2차대전)으로 오키나와인 4분의 1이 목숨을 잃었으며, 당연히 13세기말부터 14세기에 걸쳐 힘들게 만들어진 류큐왕국의 심벌 슈리성이 소실되었다. 게다가 슈리성에 관한 상세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아 1992년 오키나와 본토 복귀 20주년을 기념해 복원을 진행하기 위한 연구팀들이 일본 뿐만 아니라 중국 자금성, 우리나라 경복궁 등을 찾아보고 재질 및 디자인 등을 연구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이런 끝없는 노력이 결국 2000년 12월, 일본과 중국의 축성문화를 융합한 독특한 건축 양식과 정원석의 배치 기술에 높은 문화적·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받아 ‘류큐왕국 그스크(류큐시대의 유적) 및 관련 유산군’으로 일본의 11번째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유네스코에서는 일본과 중국의 축성문화를 융합하였다고 하였지만, 앞에서 필자가 거론한 것처럼 오키나와는 우리나라의 문화도 많이 받은 국가이다. 가장 쉽게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베자이텐도(弁財天堂)이다. 이곳은 조선왕조와 류큐 왕조 간의 교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 무로마치시대 후기인 1502년에 조선 국왕이 보낸 만책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1609년 시쯔마번(鹿兒島縣)의 침략으로 건물이 파괴되고 만책장경이 도난당했고, 현재까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한국인으로서 참 가슴 아픈 역사적 스토리이긴 하지만, 그보다 중국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슈리성의 모습을 보면 마치 우리나라의 또 다른 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 오키나와 시키나엔


이런 씁쓸함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류큐왕국은 류큐에 일시적으로 머무는 중국 사절들에게 류큐왕국이 좀 더 대국인 것처럼 보이기 위한 목적으로 시키나엔(류큐 왕실의 최대 별저이자 외국 사신들을 접대하던 곳)을 건설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시키나엔의 조원형식은 일본의 회유식 정원(근세 일본 다이묘들이 서로 다투어 만든 형식)과 중국식 정자(육모정)와 다리(반원형 다리)가 배치되어 있다. 거기에 덧붙여 류큐석회암으로 못 주위를 쌓아 류큐의 독특한 고안 방식이 엿보여 그들이 얼마나 시키나엔을 짓는데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1750년대 이후 조성을 시작하여 1799년 완성을 했다고 하니 그들의 노력 정도는 더 말할 나위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시키나엔 또한 세계제2차대전 덕에 건물들이 많이 파괴되었고, 슈리성과 함께 1975년부터 1995년에 이르기까지 약 20년 동안 복원 작업을 받아 현재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어쩌면 시키나엔과 슈리성의 복원작업은 오랜 시간 지속되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류큐왕국의 번영을 바라는 마음에서 온 것이라 생각이 든다. 그래서 에메랄드 빛 바다 위 작은 섬은 지금까지도 끝없이 변하고 있다.


과거를 복원하여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일본의 또 다른 나라 오키나와. 그곳에서 우리가 쉽게 인지하지 못한 과거사의 또 다른 가르침을 깨닫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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