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장군의 최후 격전지, 아차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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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장군의 최후 격전지, 아차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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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9.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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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성





아차산성(阿且山城)은 일명 아차성(阿且城)이라고 불리며, 최초의 조사시에는 고산성(古山城), 광진고산성 또는 광진성이라고도
불리던 고성이다.



1973년 5월 25일 사적 제234호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10만 3375㎡이다.



해발고도 200m 산정에서 시작해 동남쪽으로 한강을 향하여 완만하게 경사진 산 중턱 위쪽을 둘러서, 둘레 약 1,000m 이상의
성벽이 구축되어 있으며 동쪽·서쪽·남쪽에 성문지(城門址)가 남아 있다. 산성의 형식은 테뫼식[鉢卷式]에 속하나 규모가 매우 크고
성안에 작은 계곡도 있어 포곡식(包谷式)으로도 보인다. 성벽 구조는 삭토법(削土法)으로 대체의 형태를 축조한 뒤 그 윗부분을 따라
돌아가면서 낮은 석루(石壘)를 쌓은 듯한데, 지금은 성벽들이 무너져 토석혼축(土石混築)과 같은 모습이다. 성벽 높이는 외부에서
보면 평균 10m 정도 되며, 내부에서는 1∼2m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475년 백제의 개로왕(재위 455∼475)이 백제의 수도 한성을 포위한 3만여 명의 고구려군과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자 아들 문주를 남쪽으로 피신시킨 뒤 자신은 이 산성 밑에서 고구려군에게 잡혀 살해되었다. 이로써 백제는
한성에서 웅진(熊津)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또 고구려 평원왕(平原王:재위 559∼590)의 사위 온달(溫達) 장군이 죽령(竹嶺)
이북의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려고 신라군과 싸우다가 아차산성 아래에서 죽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백제 초기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산성은 고구려가 잠시 차지했다가 신라 수중에 들어가 신라와 고구려의 한강유역 쟁탈전 때 싸움터가 된 삼국시대의 중요한 요새였다.



서울시 광진구의 북쪽에 위치한 아차산은 서울 동대문구와 광진구, 경기도 구리시의 경계를 이루며 용마봉을 제일 높은 봉우리로 하여
야트막한 산들을 거느리고 있다.



아차산의 일반적인 산행은 강변역에서부터 시작되며 산길로 접어들면 은사시나무와 잡목이 꽉 들어차 있어 심산유곡에 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정상으로 가는 길 오른쪽으로는 아차산성 성벽을 볼 수 있다. 아차산 정상은 헬기장인데 이곳은 현재 고구려군 제 4보루라고
불린다. 고구려군이 한때 강을 마주보고 대치하고 있는 신라군에 타격을 주기 위해 현대 군사개념으로 중대에 해당하는 병력을 이
지역에 주둔시켰던 이곳에서는 토기류, 철기류가 많이 출토되었으며 온돌시설이 있는 막사터가 발견되었다.



아차산 주변에서 발견되는 장성벽과 중랑천을 굽어보는 낮은 구릉상에 설치된 여러 토성과 연관되는 성지로서 백제의 방어성을 이루고
있는 여러 고성의 중추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아직도 아차산성에 대한 충분한 조사나 복원은 이루어지고 있지 않아서 그 내용이나 성격은 현재로서 충분히 밝혀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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