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독립운동가, '박차정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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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독립운동가, '박차정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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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05.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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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의 독립운동가,
'박차정 선생'



독립기념관은 5월의 독립운동가로 박차정(朴次貞) 선생을 선정했다. 박차정 선생은 1910년 5월 7일 경남 동래에서 아버지 박용한(朴容翰) 선생과 어머니 김맹련(金孟蓮) 여사의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일제의 침탈에 항거하여 자결·순국한 아버지와 독립운동가 김두전(金枓全), 김두봉(金枓鳳)과 친척인 어머니,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숙부 박일형(朴日馨) 등의 영향으로 항일의 분위기가 강한 가정환경 속에서 선생은 자연스럽게 항일민족의식을 키워나갔다. 이에 신간회, 의열단 등에서 활동한 큰오빠 박문희, 둘째오빠 박문호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것이다.


선생은 1925년 부산지방 여성교육의 산실이자 당시 항일여성운동을 선
도하던 동래 일신여학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항일민족의식과 남녀
평등사상을 더욱 고취시키며 일신여학교 동맹휴학을
주도했다. 또한
뛰어난 문학적 기질을 바탕으로 교지 '일신'에 선생의 항일의식과 시대
인식을 표출하는 문학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1927년 민족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여성운동의 전국적인 통일기관인
근우회(槿友會)가 결성됐다. 이에 선생은 근우회 동래지회 활동을 주도하고 근우회 중앙집행위원과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임되어 선전과 출판부문에서 활동하는 등 전국적인 차원에서 여성운동과 민족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연장으로 1930년 1월 서울지역 11개 여학교의 시위투쟁인 이른바 '근우회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30년 봄,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는 둘째오빠 박문호의 연락을 받고 중국으로 망명한 선생은 국내에서 항일투쟁공로를 인정받아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 중앙위원 등 의열단의 중책을 맡아 활동했다.


1931년, 의열단 의백 김원봉(金元鳳)과 결혼하면서 본격적으로 의열단의 핵심멤버로 활약하였다. 선생은 난징(南京)으로 거주지를 옮겨 청년투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임철애, 임철산'
등 가명을 사용하며 여자교관으로 활동했다.








▶ 박차정(왼쪽)·김원봉(오른쪽)
선생 결혼 기념 사진








김원봉은 1935년 난징에서 좌우 독립운동단체 9개를 통합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했으며, 이에 박차정 선생은 부녀부주임으로 활동하는
한편, 1936년 지청천 장군의 부인 이성실과 함께 '민혁당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하고 모든 조선의 여성들이 총단결하여 민족독립운동과 여성해방운동에 참여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창립되자 선전·홍보분야를 맡아 활동하였으며 산하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으로 활동하며 의용대원의 사기진작과 선전활동에 매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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