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에서 찾은 보물,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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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에서 찾은 보물,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
  • 관리자
  • 승인 2007.0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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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0대 임금 연산군만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인물도






오늘 4월 6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국제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수원화성. 화성을 따라 걷다보면 한켠에 오도카니 자리를
잡고 있는 보물 14호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를 만날 수 있다.








 



 








▶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







 







이 탑비는 원래 고려 말의 고승 진각국사(1307·충렬왕 33~1382·우왕 8)의 행적을 알리기 위해 수원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세워졌던 것으로, 비문에는 진각국사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浮石寺)를 중수하는 등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이 실려 있다.



탑비의 비신 높이는 1.51m, 비신 폭은 0.81m이고, 전체 높이는 2.12m로, 받침돌(臺石)과 뚜껑돌(蓋石)은 화강석이다.
제액(題額: 비신의 상단부나 이수에 비의 명칭을 새긴 부분)은 “贈諡眞覺國師碑銘”, 비신은 “高麗國國師大華嚴宗師禪敎…”로 시작되나
이하는 결실되었고, 행문(行文)은 “洪武十五年夏六月十六日…”로 시작되지만 이 또한 많이 결실된 상태이다. 탑비의 비문은 이색이
짓고 승려인 혜잠이 글씨를 새겼는데, 비문을 새긴 비몸돌은 마멸이 심하고 오른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으며, 지붕돌은 경사면이
완만하다.



탑비의 양식을 살펴보면 지대위에 장방형의 비받침을 놓고 비몸돌을 세운 다음 네 개의 추녀마루가 동마루에 몰려 붙은 모습의 지붕돌을
올린 형태로, 이는 12세기 후반부터 14세기 후반에 자주 나타나는 장방형 비받침에 비신의 윗부분이 귀접이 형태인 규두형 양식과
지붕형 이수를 지닌 옥개형 양식의 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탑비의 외관을 보면 고려 초기의 웅장하고 정교한 모습에 비해
단순하고 기교도 많이 절제되어 있는 모습을 보인다.



탑비의 글씨 또한 고려 전기의 힘있는 풍모가 사라진 투박한 것으로, 고려 후기의 글씨가 퇴보하였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역시 고려초기의 강인했던 기상이 한풀 꺾이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가던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듯 보인다.








 



 








▶ 화성과 탑비를 함께 볼 수 있다







 







현재 탑비가 세워져 있던 창성사는 절터만 남아 건물의 기단석·주초석·옥개석·와편 등이 산재해 있고, 탑비는 보호의 목적으로 원
소재지를 떠나 화성에 자리잡고 있는 상태이다. 수백년 자리하던 곳을 떠나게 된 탑비에겐 미안한 일이나, 화성을 돌아보면서 보물
14호로 지정된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를 만나 볼 수 있다는 점이 관람객들에게는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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