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륵사와 가장 인연이 깊은 인물은 역시 나옹화상이다. 양주의 명찰 회암사에서 나옹화상이 주도하는
설법이 있을 때마다 민초들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수많은 사람이 나옹의 뜻을 따르니 왕은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유생들의 탄핵도 한몫을 햇다. 결국 왕은 나옹을 밀양 영원사로 보낼 것을 명령한다. 유배 아닌 유배를 떠난 나옹은 실의뿐만 아니라
병마에 시달렸다. 천리길을 걷기엔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데 젊은 시절 머물렀던 신륵사를 지나칠 때 더 이상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의 죽음을 그때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시대를 풍미했던 대선승 나옹화상은 신륵사에서 열반에 들고만다. 열반의
소식을 들은 그의 제자들은 신륵사로 달려와 다비식을 하고 부도를 조성하여 스님의 덕을 기렸던 것이다. 훗날 세종의 능이 여주로
이장되자 신륵사는 능을 지키는 원찰이 되어 왕실의 보호를 받게되며 오늘날까지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20미터가 넘는 은행나무가 마당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다. 6백년 세월의 무게 때문인지 가지는 힘겹게 드리워져 있다. 하긴
신륵사의 흥망성세를 지켜본 유일한 목격자는 바로 이 은행나무다. 나무를 그늘을 스치고 지나가면 신륵사에서 가장 전망이 좋다는 곳
"강월헌"이 나온다. 절벽위 험준한 곳에 정자를 올려 세웠다. 위태로운 위치에 놓인만큼 이 곳의 경치는 절묘하다. 여주의 들녘이
한 눈에 보이며, 굽이도는 남한강의 경치를 감상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다. 강월헌 옆의 암반위에는 3층석탑이 자리잡고 있다.
바위에 주저앉고 말없이 흘러가는 남한강을 바라보면 풍요로움과 애절함이 교차한다. 여주의 들녘은 풍요로움을 선사해주고 낡아 빠진
석탑은 애절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