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기념관은 5월의 독립운동가로 박차정(朴次貞) 선생을 선정했다. 박차정 선생은 1910년 5월 7일 경남 동래에서 아버지 박용한(朴容翰) 선생과 어머니 김맹련(金孟蓮) 여사의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선생은 1925년 부산지방 여성교육의 산실이자 당시 항일여성운동을 선 |
1927년 민족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여성운동의 전국적인 통일기관인 또한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연장으로 1930년 1월 서울지역 11개 여학교의 시위투쟁인 이른바 '근우회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
1930년 봄,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는 둘째오빠 박문호의 연락을 받고 중국으로 망명한 선생은 국내에서 항일투쟁공로를 인정받아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 중앙위원 등 의열단의 중책을 맡아 활동했다. 1931년, 의열단 의백 김원봉(金元鳳)과 결혼하면서 본격적으로 의열단의 핵심멤버로 활약하였다. 선생은 난징(南京)으로 거주지를 옮겨 청년투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임철애, 임철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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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은 1935년 난징에서 좌우 독립운동단체 9개를 통합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했으며, 이에 박차정 선생은 부녀부주임으로 활동하는 또한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창립되자 선전·홍보분야를 맡아 활동하였으며 산하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