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눈의 독립운동가, 윤산온 선생님의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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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눈의 독립운동가, 윤산온 선생님의 사연
  • 임영은 기자
  • 승인 2020.02.28 14: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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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적으로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학생들에게 시킬 수 없다”

삼일절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관련 행사들은 대부분 취소되거나 연기되었으나 그들을 기억하기 위한 매체의 보도들은 많이 쏟아지고 있다.

 

독립운동가는 국적, 성별, 연령을 가리지 않고 많은 활동을 펼쳤다. 이번에 소개하는 조지 새넌 맥큔 역시 푸른 눈을 가진 외국인이지만, 독립운동에 힘썼던 인물로 20202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조지 새넌 맥큔 (사진 = 독립기념관)
조지 새넌 맥큔 (사진 = 독립기념관)

 

조지 새넌 맥큔은 1873년 미국 펜실베니아 주 출생으로, 1905년 아내 헬렌과 함께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왔다. 평양에서 자리를 잡고 당시 숭실학교 교장이었던 윌리엄 베어드와 함께 한국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 윤산온이라는 한국 이름을 짓고 한국어를 배우며, 한국과 친숙해지려 노력했다.

 

1911년 일제가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의 독립운동 탄압을 명목으로 조작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감시대상이 된다. 맥큔은 부당한 대우에 미국 선교 본부에 바로 보고했다. 특히 일제의 무단통치의 실상을 해외 언론에 알려 재판이 일제의 의도대로 진행될 수 없도록 막았다.

 

3.1운동에서도 맥큔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지 않도록 보호했으며, 미국 컨티넨트잡지에 일제의 3.1운동 탄압을 규탄하는 글을 게재했다. 뿐만 아니라 1920년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광복군총영 학생 박치의의 사형판결을 변호하는 등 학생들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930년대 숭실학교 전경 (사진 = 독립기념관)
1930년대 숭실학교 전경 (사진 = 독립기념관)

 

일제에게 극단적 배일자로 분류되는 등 감시가 심해지자 맥큔은 한국을 잠시 떠났고, 1928년에 다시 돌아와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1936년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에 양심적으로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학생들에게 시킬 수 없다, 거부했고 결국 교장직에서 파면 당한다.

 

그 후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비판하는 강연과 논설 기고를 지속했으며, 194112월 서거한다. 이러한 공훈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맥큔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국적과 생김새는 달라도 우리의 독립을 응원했으며, 특히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켜낸 조지 새넌 맥큔. 또 다른 이름인 윤산온 선생은 오늘의 우리나라를 본다면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가의 노력을 기억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지 않을까.

 

취재팀 임영은

lzs0710@icp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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